진주3·1만세운동 3

진주 3·1만 세 운동③-‘진주 기생이 앞서서 형세 자못 불온’

“진주는 지금도 오히려 진정이 안 되고 자꾸 소요가 일어날 형세가 있는데, 19일은 진주 기생의 한 떼가 구 한국 국기를 휘두르고 이에 참가한 노소 여자가 많이 뒤를 따라 진행하였으나, 주모자 여섯 명의 검속으로 해산되었는데, 지금 불온한 기세가 진주에 충만하여 각처에 모여있다더라.” 일본 제국주의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1919년 3월 25일 자 ‘진주 기생이 앞서서 형세 자못 불온’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위와 같이 보도했다. 1919년 3월 1일 울렸던 대한 독립 만세운동이 전국에 퍼져 나갈 때 진주는 상대적으로 늦은 18일, 그날의 뜨거운 함성이 울렸다. 다른 지역보다 만세 시위는 늦었지만, 천민 신분이던 걸인과 기생들도 시위에 참여했다. 진주 3·1 만세운동은 3월 18일 정오에 진주교회..

진주 속 진주 2025.03.09

진주 3·1만 세 운동②-진주 하늘을 울린 종소리

진주 3·1 만세운동은 3월 18일 장날 정오에 진주중앙시장, 옛 진주법원 앞, 진주성, 대안동, 대사지 매립지 앞 다섯 군데에서 동시다발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시계도 제대로 없던 그 당시 만여 명의 사람들이 어떻게 알고 일시에 만세를 외쳤을까?정오에 울리던 진주교회 종소리를 신호로 했다. 1936년 일본 제국주의 식민 지배 때 경상남도 경찰부가 쓴 『고등경찰관계적록(高等警察關係摘錄)』에 따르면 “주모자들이 3월 18일 진주 장날에 즈음하여 예수교 예배당(진주교회)에서 알리는 정오 종소리에 맞춰 일제히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며 약 1만 군중이 모여”로 기록하고 있다.진주 중·고등학교 옆에 있는 진주교회는 1905년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 소속 의료선교사 커럴 가족이 처음으로 세운 곳이다. 진주교..

진주 속 진주 2025.03.08

진주3·1만세운동①-‘진주와 서부 경남 3·1운동 발상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제헌 헌법은 물론이고 현행 헌법 제1조에 새겨진 이 조항에는 3·1운동(삼월 대혁명) 이후 우리 민족이 흘린 수많은 피와 땀이 녹아 있다. 1910년 한일 강제 병합 당시에도 대한제국 황제가 권력의 유일한 주체였다. 불과 9년 뒤 일어난 3.1운동을 계기로 인민(人民)이 주권자인 대한민국으로, 혁명적으로 바뀌었다. 일제 식민 통치에서 벗어난 자주독립의 의미와 함께 국민이 주권이라는 의식의 변화를 불러왔다. 106년 전 오늘, 식민지 조선의 백성 모두가 떨쳐 일어나 “대한 독립 만세”를 불렀다. 독립은 이루지 못했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왕정복고가 아니라 국민이 주인인 공화정으로 나갈 기반을 마련했다. 그날의 함성을 떠올리며 먼저 ‘3·1운동 발상지’부터 찾았다. 말..

진주 속 진주 2025.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