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천서원 7

다시 남명이다7-남명 조식 애제자 덕계 오건과 수우당 최영경

다시 남명이다7-남명 조식의 애제자, 덕계 오건과 수우당 최영경 ‘in 서울’ 떠나 천릿길 진주로 내려온 제자 “앞으로는 오직 서울의 10리 안에서만 살아야 한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유배 중이던 1810년 초가을 아들에게 보낸 편지 일부다. 당쟁의 희생자 대부분이 시골에서 은둔을 선택한 것과 달리 다산은 서울 사수를 주장했다. 정보와 네트워크의 중요성 때문에 다산은 자녀들의 서울 생활을 고집했다. 이와 달리 오히려 ‘in 서울’을 탈출, 천릿길 진주로 향한 사람도 있었다.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1529~1590)이 그렇다. 수우당은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벼슬을 이어온 집안으로 아쉬운 것이 없던 문벌 출신의 서울 사람이었다. 1565년 오직 스승인 ..

다시 남명이다6- 지리산 별이 된 조선 선비, 남명 조식

지리산 별이 된 조선 선비 지리산으로 가는 길, 남명 만나러 가는 길 이름만 떠올려도 설레는 지리산. 마침내 지리산에서 별이 된 조선 선비가 있다. 바로 남명 조식(南冥 曺植⸱1501~1572년)이다. 지리산을 수십번을 다녀온 남명은 나이 61세가 된 1561년(명종 6년),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진주 덕천동 (산청군 덕산면)으로 이사를 했다. 후학을 양성하기 위한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1572년 2월 8일 72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감했다. 남명을 만나러 가는 길은 지리산을 만나러 가는 길이기도 하다. 지리산 자락은 뙤약볕이 무자비하게 내리쬐던 여름날에도 차 안 에어컨을 끄게 한다. 차창을 내리자 싱그러운 기운이 깊고 느리게 밀려온다. 계곡을 따라가다 길가 주차장에서 잠시 시동을 껐다. 지리산 중..

남명 조식 선생 숨결을 느끼고 다짐하는 곳-산청 덕천서원

“호랭이는 그 잘난 ‘가죽’ 땜시 뒈지고, 사람은 그 잘난 이름값 허느라 개죽음 허는 겨, 이 화상아!” 영화 에서 장수 계백(박중훈 분)은 전장에 나가기 전 가족을 불러 모은다. 이때 계백의 아내(김선아 분)가 어차피 적의 손에 죽느니 차라리 제 손으로 죽이는 게 낫다며 칼을 든 계백에게 일갈하는 장면은 아직도 선명하다. 잘난 이름 석 자 남기기 위해 얼마나 나 자신을 비롯해 가족과 주위 사람들에게 골병들게 하는 사람이 많은가. 남명 조식 선생 흉상(합천 용암서원⸱위쪽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과 영정, 큰들 마당극 속 남명선생, 남명 동상(남명기념관) 내가 요구하고 바란다고 명예와 권위가 생기지 않는다. 내게 주어진 삶을 곧고 바르게 충실하게 살면 절로 따라오는 게 명예와 권위가 아닐까. 2018년도 물..

마음 벼리는 시간- 저자와 함께하는 남명 조식 선생의 자취를 찾아서

4월 15일, 경남 진주문화연구소에서 펴낸 <진주 문화를 찾아서- 남명 조식>의 저자인 허권수 경상대 명예교수와 함께하는 ‘남명 조식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서’ 라는 주제로 떠나는 여행은 먼저 산청 덕천서원(德川書院)으로 향했다. 경의당 뒤편 남명 선생의 위패를 모신 숭덕사(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