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5일, 경남 진주문화연구소에서 펴낸 <진주 문화를 찾아서- 남명 조식>의 저자인 허권수 경상대 명예교수와 함께하는 ‘남명 조식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서’ 라는 주제로 떠나는 여행은 먼저 산청 덕천서원(德川書院)으로 향했다. 경의당 뒤편 남명 선생의 위패를 모신 숭덕사(崇德祠)로 허권수 명예교수는 일행을 곧장 이끌었다.
눈 시리도록 하늘이 푸른 날이었다. 4월 15일, 경남 진주문화연구소에서 펴낸 <진주 문화를 찾아서- 남명 조식>의 저자인 허권수 경상대 명예교수와 함께하는 ‘남명 조식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서’ 라는 주제로 떠나는 여행은 먼저 산청 덕천서원(德川書院)으로 향했다.
남명 선생을 기리기 위해 1576년 후학들이 창건한 덕천서원은 1609년 사액을 받았다.
붉은 홍살문 옆 400년이 넘은 은행나무를 지나 서원으로 들어갔다. 배롱나무의 민낯도 그냥 지나쳐 경의당 뒤편 남명 선생의 위패를 모신 숭덕사(崇德祠)로 허권수 명예교수는 일행을 곧장 이끈다.
조선 시대 선비들이 모여 학문을 연구하면서 믿고 따르던 옛사람을 제사 지낸 곳인 서원(書院). 이곳 덕천서원은 남명 조식 선생을 모신 곳이라 선생께 제일 먼저 인사를 올리는 게 예의라며 몸을 굽혀 절하며 예를 차리는 국궁배례(鞠躬拜禮)를 구호에 맞춰 올렸다.
덕천서원 강당인 ‘경의당(敬義堂)’에서 남명 선생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강의를 허권수 경상대 명예교수에게 들었다.
남명 선생을 기리기 위해 1576년 후학들이 창건한 덕천서원은 1609년 사액을 받았다. 덕천서원 강당인 ‘경의당(敬義堂)’에서 남명 선생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강의를 들었다. 남명 선생은 평생 산림처사로 항상 깨어있는 정신으로 매사에 거짓이 없고 도리에 어긋남이 없이 행동을 삼가는 ‘경(敬)’을 바탕으로 배운 것을 실천하는 ‘의(義)’를 실현한 선비다.
남명 조식 선생 묘
덕천서원을 나와 근처 남명선생 기념관 뒤편 묘소로 향했다. 옥색 두루마기를 입은 선생 주위로 초록빛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이 잠시 선생의 당시로 이끄는 기분이었다. 묘소 주위에는 보랏빛 제비꽃들이 걸음걸음 옮기는 우리를 반긴다.
남명 조식 선생 영정
임금이 불러도 나가지 않는 선비 징사(徵士)였던 선생은 “창문을 열어라. 아침 해가 너무나 청명하구나”하며 돌아가셨다고 전한다. 이날도 하늘은 맑고도 밝았다.
묘비는 ‘징사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문정공 남명 조선생지묘(徵士贈大匡輔國崇錄大夫議政府領議政文貞公南冥曺之墓)’라고 적혀 있다. 헌화한 뒤 국궁배례로 예를 갖춘 뒤 기념관 건너편 산천재로 향했다.
명종 16년(1561년) 남명 선생이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친 산천재(山天齋).
산천재(山天齋)는 명종 16년(1561년) 남명 선생이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친 곳으로 산천(山天)은 ‘굳세고 독실한 마음으로 공부하여 날로 덕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다. 남명매(南冥梅) 옆 산천재 주련에는 덕산복거(德山卜居 덕산에 터를 잡고) 시 한 수가 적혀 있다.
‘春山底處無芳草(춘산저처무방초)봄 산 아래쪽엔 향기로운 풀 없으랴마는
只愛天王近帝居(지애천왕근제거) 천제 사는 곳과 가까운 천왕봉만 좋아라
白手歸來何物食(백수귀래하물사) 맨손으로 돌아와 무얼 먹고 살겠냐고?
銀河十里喫有餘(은하십리끽유여) 은하수처럼 십 리 흐르는 물 마시고도 남으리.’
산천재 주련에는 덕산복거(德山卜居 덕산에 터를 잡고) 시 한 수가 적혀 있고 편액 뒤에는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는 선생의 ‘천석종(千石鐘)’ 시 한 편이 걸렸다.
편액 뒤에는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는 선생의 ‘천석종(千石鐘)’ 시 한 편이 걸렸다.
‘請看千石鐘(청간천석종) 천 석들이 종을 보라
非大구無聲(비대구무성)크게 치지 아니하면 소리 나지 않네
爭似頭流山(쟁사두류산)어찌하면 두류산처럼
天鳴猶不鳴(천명유불명)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 수 있을까‘
남명 기념관에 들어서면 사람의 마음((神明)이 머무르는 집(舍)을 그린 <신명사도(神明舍圖)>가 먼저 반긴다.
산천재를 나와 다시 길 건너편 남명기념관으로 향했다. 성성문(惺惺門)을 들어서자 밝고 붉은 겹벚꽃이 반긴다. 왼편으로 선생의 동상과 신도비, 사직소 등을 새긴 비들이 나란히 서 있다.
남명 조식 선생이 허리춤에 찬 방울 소리가 울리고 울릴 때마다 몸가짐을 살피고 반성했던 성찰의 방울인 성성자(惺惺子)
기념관으로 들어서자 사람의 마음((神明)이 머무르는 집(舍)을 그린 <신명사도(神明舍圖)>가 먼저 반긴다. 선생이 마음의 안과 밖을 잘 다스려 지극한 선의 경지에 도달하는 이치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마음의 작용을 임금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 비유하여 도식화한 것이다. 신명사도는 사람의 마음을 지키기 위한 결연한 의지를 성곽으로 드러내고 마음을 다스리는 요체를 경(敬)으로 설명하고 의(義)로써 실천하라 일러준다.
남명 선생이 늘 품고 다닌 경의검(敬義劍)에는 ‘내명자경(內明者敬)’과 ‘외단자의(外斷者義)’라는 새겨진 글자에서 선생의 실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기념관에서 선생이 허리춤에 찬 방울 소리가 울리고 울릴 때마다 몸가짐을 살피고 반성했던 성찰의 방울인 성성자(惺惺子)와 ‘내명자경(內明者敬)’과 ‘외단자의(外斷者義)’라는 글자를 새긴 경의검(敬義劍)을 보면서 선생의 실천 의지를 엿보았다.
합천 뇌룡정 기둥에는 ‘시거이용현(尸居而龍見) 연묵이뢰성(淵默而雷聲)’이라 적혀 있다. ‘죽은 듯 있다가도 용처럼 나타나고 깊은 못처럼 조용하다가도 우레처럼 소리 낸다'라는 뜻이란다.
기념관을 나와 점심을 먹고 이동한 곳은 선생이 태어난 합천군 삼가면 외톨이(外吐里)다. 처가인 김해에서 돌아와 후학을 가르친 뇌룡정 기둥에는 ‘시거이용현(尸居而龍見) 연묵이뢰성(淵默而雷聲)’이라 적혀 있다. ‘죽은 듯 있다가도 용처럼 나타나고 깊은 못처럼 조용하다가도 우레처럼 소리 낸다'라는 뜻이란다.
꾸준히 실력을 쌓아서 때를 기다리라는 선생의 가르침은 나라가 위험에 처했을 때 분연히 떨쳐 일어났던 의병장 곽재우·정인홍 같은 제자에서 엿볼 수 있다.
합천 용암서원.
뇌룡정을 나와 용암서원으로 향했다. 용암서원은 선비들이 남명 조식 선생을 제사 지내며 공부하던 곳이다. 1576년 노흠, 송희창 등이 의논하여 가회면 장대리에 세운 회산서원이 전신이다. 동북아국제전쟁(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1601년 황강 주변으로 옮겨 향천서원으로 복원되었다가 1699년 용암서원으로 사액 받았다. 대원군 때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현재의 자리로 복원했다.
동북아국제전쟁(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활약한 곽재우(1552~1617)와 휘하 장수17명의 위패를 봉안한 충익사로 가는 길에 나부끼는 깃발들.
용암서원을 나와 마지막으로 이동한 곳은 의령군 의령읍에 있는 충익사다. 의병장 곽재우 장군과 함께 싸운 17명의 장수를 기리는 곳이다. 남명 선생의 외손녀 사위이기도 한 망우당 곽재우는 선생의 가르침을 받아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분연히 떨쳐 일어나 나라를 구했다. 동북아국제전쟁(임진왜란) 때 조선이 멸망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의병이다. 당시 의병의 절반은 선생의 제자들인 곽재우를 비롯한 정인홍 등이었다. 배운 것에만 머무르지 말고 실천하라고 가르친 선생이 조선을 구했다.
합천군 삼가면 용암서원 앞에 세워진 남명 조식 선생 흉상
남명 조식 선생의 흔적을 찾아 나선 길은 마음을 벼리는 시간이다. 의지가 흔들리거나 처음 먹었던 마음을 다잡고 실천하고자 한다면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마음을 벼리는 시간을 찾는 것도 좋을 것이다.
'남명 조식선생 발자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폭도 아니고 왜 남명은 창자를 가르겠다고 했을까 (0) | 2017.06.24 |
---|---|
처가살이하며 학문의 깊이를 더한 남명 조식 -김해 산해정을 찾아서 (0) | 2017.05.20 |
하동여행, 참된 사제지간을 만나다 – 하동 수정당 (0) | 2017.03.18 |
남명 조식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서 - 공부하는 때를 놓치지 않으려 찾은 산,의령자굴산,명경대 (0) | 2017.03.14 |
남명 조식 선생 발자취를 따라2-실천하는 삶을 살아가겠노라 다짐하다 (0) | 2017.0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