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조식선생 발자취

조폭도 아니고 왜 남명은 창자를 가르겠다고 했을까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17. 6. 24.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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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명 조식 선생의 자취를 찾아서, 거창 포연(鋪淵)을 가다

 

 

통일이다. 온갖 색으로 밀고 당기던 산과 들은 이제 녹색으로 통일했다. 유월인데도 오후 햇볕은 뜨거워 그늘로 숨고 싶은 618, 아들과 함께 시원한 풍광이 펼쳐지는 경남 거창으로 떠났다. 실천하는 칼찬 선비 남명 조식 선생이 떠났던 그곳으로.

 


경남 거창군 신원면 소재지에서 합천 쪽으로 가는 굽은 길.

 

거창군 신원면 소재지를 지나 합천군 쪽으로 가는 굽은 길 오른쪽으로 계곡이 함께 한다. 날이 덥고 가물어 아쉽게도 계곡물 흐르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면 소재지를 지난 지 5분여 거리에 차를 세웠다. 구사(九士)마을이 나온다. 햇볕이 뜨거운 날이라 오가는 사람도 드물다. 마침 지나는 할머니께 여쭤 소진정(遡眞亭)을 가는 길을 찾았다.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 있는 구사마을에는 소진정, 임청정 등 정자가 감악산 계곡을 끼고 들어서 있다.

 

소진정은 지나온 길가에서는 나무에 둘러싸여 보이지 않았지만, 길가 절벽 위에 있었다. 승훈재(承訓齋)라는 재실이 먼저 나온다. 승훈재를 지나 열린 문을 따라 들어갔다. 소진정이 나왔다.

 


우천 도재균이 조상을 기려 1920년에 절벽 위에 세운 소진정

 

우천 도재균이 조상을 기려 1920년에 절벽 위에 세운 정자다. 정자를 그냥 지났다. 열린 문을 따라 나무 사이로 갔다. 배롱나무가 열린 문으로 고개를 내미는 나를 반긴다. 배롱나무 너머로 큼지막한 바위가 보이고 옆으로 선 소나무가 마치 공손하게 길가쪽으로 절하는 모양새다.

 


소진정 옆에는 포연대라 적힌 바위가 있고 옆으로 선 소나무가 마치 공손하게 길가쪽으로 절하는 모양새다.

 

소나무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바위에 포연대(鋪淵臺)라고 새겨져 있다. 포연대에서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남명 조식 선생이 목욕했다는 포연이 보인다. 날이 가물지만 않다면 시원한 바람에 장단 맞추듯 물줄기 힘차게 흘러갔을 텐데‧‧‧.

 


포연대에서 바라본 감악산 계곡. 남명 조식 선생은 1549년 이곳에서 목욕했다.

 

소나무 아래에서 바람을 쐬다 지나쳐온 소진정으로 올랐다. 소진정에서 바라보는 풍광 역시 맑고 푸르다. 소진정에서 땀을 식힌뒤 바로 아래에 있는 임청정(臨淸亭)으로 향했다. 소진정을 짓고난 뒤 4년 후에 임청정을 지었다고 한다. 가까운 곳에 이렇게 정자를 두 개를 지은 까닭은 주위 풍광이 아름답기 때문이리라.

 


소진정 아래에는 있는 임청정(臨淸亭)

 

정자는 길가에서 보면 나무에 둘러싸여 보이지 않는다. 가파른 길로 내려가면 금방 포연에 이르겠지만 차를 가져온 탓에 다시 차를 몰아 거창 신씨 묘역이라는 이정표가 보이는 곳 근처에 차를 세웠다. 근처에 차를 세울 마땅한 곳이 없다.

 


거창 구사마을에 있는 소진정과 임청정은 나무들에 둘러싸여 길가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계곡 옆으로 하늘을 찌를듯한 빗돌이 서 있다. 빗돌에는 남명 조식 선생이 포연에 와서 지은 시(욕천(浴川)이 새겨져 있다. 바위에 새겨진 글자는 읽기 불편했다. 차라리 안내판을 세웠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선생은 1548(명종 3) 어머니 삼년상을 치르고 상복을 벗었다. 처가인 김해에서 합천군 삼가면 토동으로 돌아와 계부당(鷄伏堂)과 뇌룡사 (雷龍舍)를 짓고 후학들을 가르쳤다. 이듬해 추석이 막 지날 때 제자들과 거창 감악산을 유람했다.

 


남명 조식 선생은 거창 감악산에서 내려와 감악산 골짜기를 흐르는 물이 바위에 부딪혀 소용돌이치는 곳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목욕했다고 한다. 아쉽게도 찾은 날은 타는 땅이 쩍쩍 갈라지듯 목마른 소리가 대신했다.

 

선생이 감악산을 오른다는 소식에 인근 함양 선비인 임희무박승원 등 여러 사람이 찾아와 함께 했다. 선생 일행은 감악산 정상에서 서쪽으로 길게 내달리는 지리산을 보고 남쪽 바닷가 사천에 있는 와룡산을 보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렀을 것이다.

 

선생은 산에서 내려와 감악산 골짜기를 흐르는 물이 바위에 부딪혀 소용돌이치는 곳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목욕했다고 한다. 아쉽게도 찾은 날은 타는 땅이 쩍쩍 갈라지듯 목마른 소리가 대신했다.

 

잠시 눈을 감고 푸른 물이 넘실거리며 시원하게 흘러갔을 당시를 떠올렸다. 선생이 남긴 냇물에 목욕하고서(욕천(浴川)’라는 시를 조용히 읊조렸다.



남명 조식 선생의 시 냇물에 목욕하고서(욕천(浴川)’가 새겨진 빗돌이 마치 선생의 기상처럼 날카롭게 서 있다.

 

사십 년 동안 더렵혀져온 몸/ 천 섬 되는 맑은 못에 싹 씻어버린다./ 오장 속에 만약 티끌이 생긴다면/ 지금 당장 배 쪼개 흐르는 물에 부쳐보내리/’(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에서 옮긴 <남명집>중에서)

 


감악산 계곡에서 목욕하면서 남명 조식 선생은 티끌이 있다면 창자를 갈라 깨끗하게 하겠다는 섬뜩할 정도로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지켜가려는 강렬한 의지를 드러냈다.

 

오싹하다. 티끌이 있다면 창자를 갈라 깨끗하게 하겠다는 섬뜩할 정도로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지켜가려는 강렬한 의지를 드러냈다. 당시 49세였던 선생은 추석 이후라 차가운 물에 몸을 맡겨 정신을 가다듬고 이 다짐을 생을 함께했다.

 

오늘 역사를 만나고 자연을 거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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