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연암도서관에서 빌린 <진주농민운동의 역사적 조명>, <천년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문화 예술의 도시, 진주>, <징비록>을 3월의 첫날 반납했다. 반납을 앞두고 잊지 못할 책의 고갱이를 정리했다.
<진주농민운동의 역사적 조명>은 2002년 진주농민항쟁 140주년을 맞아 진주농민항쟁기념사업회와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이 공동으로 주최한 기념 학술행사의 성과물로 만든 책이다. 전국 농민항쟁의 시작이었던 1862년의 진주농민항쟁. 1894년 농민전쟁 때와 일제식민지를 동안 우리나라 농민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했던 우리 고장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책은 ‘1862년 농민항쟁과 진주, 진주 인근에서의 동학군 봉기, 1920년대 진주지역 농민운동, 해방 직후 진주지역의 농민운동, 진주지역 농민운동의 현단계’와 같이 다섯 개 주요 의제를 설정 진주농민항쟁 뿐 아니라 이후의 진주지역 농민운동의 흐름을 살펴보았다.
1862년 농민항쟁과 진주
1862년 진주 농민항쟁에 대해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다. 19새기 환곡을 비롯한 읍폐에 대해 여러 차례 저항이 있었으며,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1862년 조직력을 강화시키고 적극적인 항쟁으로 나타났다. 항쟁이 발발하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먼저 지도부가 형성되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모의가 이루어지는 과정과 공개 집회를 통해 대중을 끌어들였다. 몰락한 양반과 초군(나뭇꾼) 지도가 중심이었다. 양반층의 참여도 몰락한 양반을 넘어 상당히 폭이 넓어 유력 사족과 토호층, 일부 부유층을 제외하고는 참여폭이 매우 넓었다. 초군의 대거 차명는 단순히 항쟁의 양적 확대만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조직활동을 강화하는 기반이 되었다. 항쟁과정은 지도부의 면밀한 계획과 실천의지, 초군의 적극적인 참여가 결합되어 이루어졌다.
1862년 진주 농민항쟁은 우리나라 농민운동의 수준을 한 단계 드높였다. 반면 당시 농민운동의 한계도 명확히 드러냈다. 항쟁이 진주라는 한 읍에서만 이루어졌다. 당시 인근 읍의 농민도 참가하기는 했으나, 읍 차원의 연대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한 차례 공격이 끝난 후 쉽게 해산했다. 자신들의 요구를 확실히 보장받지 못하고 곧 탄압을 받았다. 봉건 권력을 무너뜨리지 않는 한 겪을 수밖에 없는 한계다.
1862년 농민항쟁은 전개과정에서도 끊임없이 발전했고, 이후 농민운동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특히 개항 뒤의 농민항쟁과 1894년 농민전쟁으로 연결되었다.
진주 인근에서의 동학군 봉기
진주는 예부터 서부 경남지역의 중심지였다. 반란이 일어나면 주위 고을에 큰 영향을 주었다. 동조세력이 쉽게 형성될 여건이 조성되었다. 진주 인근의 지리산은 산이 넓게 퍼져있고 골이 깊었기 때문에 옛날부터 도적이나 여러 변란과 사회운동을 도모하는 세력들의 중요한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토지가 비옥해서 농민들이 성장할 수 있는 지역적 조건도 마련되었다. 과격하고 저항적 성격이 두드러진 남명의 학풍을 계승하고 있었다. 인조반정과 무신란으로 남명학풍을 이단시되면서 이들의 입지는 다른 지역에 비해 침체될 수밖에 없었다. 이 지역의 몰락 사족들이 여러 사회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진주를 중심으로 서부 경남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였던 동학도들은 각 고을 차원에서 폐정개혁을 요구하고 향리, 토호, 사찰 등 일반 민중을 수탈했던 계층, 세력들에게 징벌을 가했다. ‘척왜양’을 전면적으로 제기하고 개화파에 대해서도 적개심을 분출했다.
9월 말경부터 대구에서 파견된 관군과 일본군에 의한 동학군 토벌이 진행되었다. 하동 광평동 전투, 곤양의 금오산 전투, 진주의 고승산성 전투에서 동학군이 패배하면서 주력군은 크게 약화되었다.
현재는 하동군에 속하는 186m의 야트막한 고성산(고승당산·구시렁산). 1894년 일어난 동학농민전쟁의 항일 전적지다. 동학농민군 5000여명이 이곳에 석성을 다시 쌓고 무장한 일본군과 처절한 전투를 벌였지만 패퇴했다고 한다. 이때 희생된 186명의 동학군을 기리는 위령탑이 산 정상 부근에 세워져 있다.
1920년대 진주지역 농민운동
1920년대 진주지역 농민운동은 전체 대중 운동을 선도할 정도로 선진적이고 활발했다. 1922년 9월 초에 개최된 소작노동자대회에서 창립 후 6개월 간의 소작관행조사를 거쳐 소작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 방침과 활동방향을 제시한 것은 이제 막 전개되기 시작한 농민운동의 일대 방향을 제시한 것이었다. 소작쟁의 과정에서 지주의 소작권 박탈에 대항하여 시도한 공동경작(공동이앙)도 새로운 투쟁방법이었다.
해방 직후 진주지역의 농민운동
해방직후 활발하게 전개되던 자주적 민족국가 수립과 농민운동은 1946년 상반기를 전기로 하여 약화되었다. 미국측이 냉전정책에 입각, 한반도를 대소 군사기지로 확보하기 위해 자본가 세력을 정치적 경제적으로 강화하고 좌익세력을 강력하게 탄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체적 입장을 신탁통치와 관련 주체적 입장을 견지하지 못하고 좌익은 대중성을 잃어가면서 우익이 득세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진주지역 농민운동의 현단계
농민대중을 조직화함으로써 농민운동의 주체를 다수의 중소농 중심으로 강화해야 한다. 활동가들의 헌신성에 주로 의존해온 조직운영을 농민대중이 직접 참여하는 운영방식으로 전환시키고, 조직 내 민주주의를 발전시켜나가야 한다. 농업문제는 한국자본주의의 구조와 밀접히 얽혀 있다. 전제 국민 중 농민들의 수가 소수다. 농민들 힘만으로는 농민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연대활동을 강화해야 한다. 지방정치에 적극 참여해 지방자치단체와 농협의 민주화에 힘써야 한다. 민중의 진보정치역량 강화에 적극 참여한다.
정현찬 당시 진주농민항쟁기념사업회장은 “진주농민항쟁 140주년을 기념해서 이를 재조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어떤 가치관을 중심에 두고 살아야 되는가를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였다.”고 했다. 나에게는 어떤 계기였는지 이후 곰곰이 생각해볼 참이다.
‘천년의 시간을 응시하라 –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숨 쉬는 시민의 공간, 진주성.
호수에서 시작되는 진주의 계절 - 경남 유일의 인공호수, 진양호
여기, 진주의 희망이 솟아오른다 - 희망과 다짐을 부르는 월아산 해돋이
가을밤, 남강에 소망의 등이 흐른다 - 최고의 밤 축제로 자리매김한 진주남강유등축제
맛 대결 벌인다면 진주가 대한민국 국가대표.
진주의 자부심, 진주의 자랑 - 하공진, 성여신, 강민첨, 정온, 박생광, 설창수, 이상근, 이선유‘
작은 제목들만 나열해도 가슴이 뛴다. ‘눈부신 도시, 내일은 맑음’이라는 소제목처럼 내일 맑기 위해 나는 오늘의 진주를 열심히 찾고 기록하고 싶다.
‘<징비록>이란 어떤 책인가?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그 가운데 전쟁 전의 일도 더러 기록한 것은 전쟁이 일어나게된 배경을 자세히 밝히기 위함이다.
아아! 임진년의 전쟁은 실로 참혹했다. 두 달이 채 못 되는 동안에 서울, 개성, 평양이 함락되고 팔도가 거의 모두 적에게 넘어갔으며, 국왕이 난을 피해 서울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징비록이란 책을 쓴 이유를 류성룡은 시작에 이렇게 적었다. 아쉬운 것은 참혹한 전쟁이라고 하면서도 ‘난’이라고 한 것이다. 임진왜란이 아니라 전쟁이다. 조일전쟁, 중국(명나라)가 참전한 동북아지역 전쟁이다. ‘동북아전쟁’이라고 해야 올바르다. 기껏 왜구들이 일으킨 ‘난리’로 적고 지금도 우리가 일컫는 것은 실상을 제대로 알려는 첫 단추부터 잘못 채운 셈이다.
<징비록>중에서도 내 고장 진주성에 관한 대목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동북아전쟁(임진왜란) 3대 대첩이라는 진주성 1차 전투의 승리 소식이 없다. 1593년 7월 20일(음력 6월 22일)부터 같은 달 27일(음력 6월 29일)까지 진주성에서 3천여 명의 조선군과 6만여 명의 민간인이 10만여 명의 일본군과 싸운 진주성 2차 전투에 관해 책은 ‘진주성이 무너지다’에 몇 가지 패인 원인을 적고 있다.
‘진주 목사 서예원은 판관 성수경과 함께 명나라 장군 접대하는 지대차사원으로 오랫동안 상주에 있다가 적이 진주로 향한다는 소식을 듣고 허둥지둥 돌아왔다. 그것이 적이 성을 포위하기 겨우 이틀 전이었다.’
성을 방어하고 지켜야할 목사와 판관이 명나라 망나니들 접대하기 위해 성을 오랫동안 비우고 이틀전에 겨우 입성했다니 기가 찰뿐이다.
‘김천일이 거느린 군사란 것도 모두 서울 저잣거리에서 모집한 무리들이었고, 김천일 자신은 병법도 알지 못하면서 지나치게 자기 의견만을 내세웠다. 그는 평소부터 서예원을 미워했다. 그래서 주인과 객이 서로 질시하게 되어 서로 다른 호령을 내렸다. 이런 이유 때문에 크게 패한 것이다.’
1592년 11월7일(음력 10월 4일) 1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김시민 목사가 당시 경상우도병마절도사였던 유숭인을 성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휘 계통에 혼란이 온다는 이유였다. 1차 진주성 전투와 2차 진주성 전투의 성공과 패인의 한 원인을 살필 수 있다. 사공이 많으면 배는 산으로 가지만 전투는 진다.
<징비록>에서 "쓸떼없이 규모가 클 뿐"이라 "결국 적의 침입을 받자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흔히 말하는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인 진주성 1차 전투 때는 왜 승리 했을까? 진주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동북아전쟁 1년 전에 외성을 평지에 축조했다. <징비록>은 진주성 1차 전투에 관한 언급이 없다. 권율의 행주대첩도 아주 간략하다. 자신이 천거한 이순신 장군에 관한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다. 류성룡 선생의 업적을 갂아 내릴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징비록>도 결국 류성룡이란 사람의 눈으로 본 전쟁 기록이라고 봐야한다.
1차 진주성 전투와 달리 2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성 밖에서 도와주는 의병이 없었다. 의병장 곽재우 장군마저도 진주성을 비우는 게 상책이라고 했다. 또한, 아쉽게도 1차 전투는 11월 7일에 일어났습니다. 2차전투에서 진주성 함락일이 6월 28일이다. 장마철이다. 날씨도 도와주지 않았다.
드라마 <징비록> 때문에 빌려 읽은 책이었다. 아내도 더불어 읽어 도서관에 반납하고 다시 빌렸다.
아내가 읽는 중인 현암사의 <징비록>에 더해 서해문집에서 펴낸 <징비록>을 더 빌렸다. 또한, <조일전쟁>도 빌려 조일전쟁, 동북아국제전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을 생각이다. <진주성 촉석루의 숨은 내력>도 빌렸다. 내고장의 자랑이고 상징인 진주성과 촉석루를 제대로 알기 위한 바람이기도 하다. <조선의 백과사전을 읽는다>도 빌렸다. 3월 16일이 반납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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