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추운 날이면 생각난다. 그때 그 사람이. 더구나 지금처럼 설날을 앞둔 섣달그믐이 다가오면. 경남 진주시 옥봉동에서 의령과 합천으로 넘어가는 말티고개에는 ‘나막신쟁이날’이라는 진주지역에서만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말티고개가 시작되는 옥봉동 삼거리 한편에는 진주 백성들이 건립한 진주 최초의 사당인 은열사가 있다. 고려 현종 때 병부상서를 지낸 은열공 강민첨 장군(963~1021)의 탄생지다.
말티고개가 시작되는 옥봉동 삼거리 한편에는 진주 백성들이 건립한 진주 최초의 사당인 은열사가 있다. 고려 현종 때 병부상서를 지낸 은열공 강민첨 장군(963~1021)의 탄생지다. 강민첨 장군은 거란의 60만 대군의 침략 때 강감찬 장군과 함께 승리로 이끈 분이다. 장군은 식읍이었던 하동군 악양, 화개, 적량, 고전면 지역 백성들의 조세부담을 덜게 해주었다.장군이 세상을 떠나자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탄생지인 곳에 사당을 지어 봄, 가을로 충절과 은혜를 기렸다고 한다. 또한, 이곳은 고려와 조선 시대 공무를 보던 벼슬아치가 묵던 공공여관인 개경원이 있던 터이기도 하다. 왕의 사진이 왕래할 때 경유하는 곳이고 진주 목사가 손님을 영접하며 쉬는 곳이었다. 진주 강씨의 은열사와 진주 하씨의 경류재가 자리하고 있다. 현재의 은열사는 1980년부터 1983년까지 3년 동안 사당과 정문, 재실 등을 새로 지어 정비한 곳이다. 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고, 사당 뒤편 바위에는 ‘강은열공유지’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비좁은 골목길에도 사람들이 살고 골목길 너머로 진주성을 비롯한 시내가 보인다. 달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달동네다.
옥봉삼거리를 지나 천천히 가파른 고갯길을 넘어가자 최근에 들어선 일식집 뒤로 골목길이 오밀조밀하다. 비좁은 골목길에도 사람들이 살고 골목길 너머로 진주성을 비롯한 시내가 보인다. 달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달동네다. 오밀조밀한 골목길을 다시 내려와 이제는 편도 2차선의 넓은 길을 따라 걸었다. 찬바람이 쌩한다. 나막신쟁이 한이 바람과 함께 지난다. 추운 절기인 동지, 대한, 소한 다 지나도 모질게 추운 날이 음력 섣달 스무 이튿날이다. 가난 때문에 단돈 석 냥을 받고 대신 모진 매를 맞고 죽은 나막신쟁이의 안타까운 죽음이야기가 있다.
말티고개
옛날 말티고개 언덕배기에 나막신을 만들어 생계를 이어가는 ‘나막신쟁이’가 살았다고 한다. 여름 한 철 장사인 나막신이 겨울에도 제대로 팔릴 리 없었다. 장날이라도 빈손으로 돌아가는 나막신쟁이의 눈에는 집에서 기다릴 딸린 식구들의 얼굴이 아련했을 것이다. 장날 물건 팔러 나간 아버지를 배웅했던 식구들 얼굴에 빈손으로 돌아가는 자신의 걸음은 무척이나 힘겨웠겠지. 나막신쟁이는 돌아가는 길에 솔깃한 제안을 받는다. 부자에게 돈 세냥을 받고 곤장 30대를 대신 맞았다. 평소 제대로 먹지도 못한 나막신쟁이가 건강한 장정도 견디기 어려운 곤장을 서른 대나 맞고 집으로 돌아가다 말티고개 중간에 쓰러지고 말았다. 밤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가장(家長) 아버지를 찾아 나선 식구들. 어두운 밤 중에 찾지 못한 가장은 날이 밝은 다음 날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꽁꽁 언 손에는 배고픈 가난한 식구들에게 사 먹일 단돈 세냥이 꼬옥 쥐어져 있었다. 나막신쟁이가 죽고 난 뒤 매년 이맘때면 모진 바람과 함께 날씨도 유난히 추웠다. 언제 가부터 진주사람들은 이날을 <나막신쟁이날>이라 부른다.
음력 섣달 스무이튿날, 한 해 마지막 장날이 섰던 이 날. 올해는 1월 22일이 바로 이날이다.
세 아들의 아빠이자, 한 아내의 남편인 나에게 나막신쟁이날은 예사롭지 않다. 외환위기를 비롯해 경제불황의 늪 속에서 식구들의 안녕을 위해 고생하는 이 땅의 아버지, 어머니들의 고단한 삶을 기리는 날로 여겨지기에.
귀신을 쫓고 남자 잘되게 하는 나무라는 붉은 열매가 촘촘히 열린 남천 나무들이 300여 미터 서 있다.
‘아빠! 힘내세요~’라고 어릴 적 아이들이 불러준 노랫말이 절로 입가에서 흥얼거린다. 그럼 그럼 힘내고말고. 고개 정상에 이르렀다. 굽잇길을 돌아본다. 저만치 지난해가 있고 다시 저 앞에는 새해가 있다. 붉은 열매가 촘촘히 열린 남천 나무들이 300여 미터 서 있다. 진주안락공원 앞 삼거리까지. 귀신을 쫓고 남자 잘되게 하는 나무라는 남천이 말티고개에, 그것도 진주안락공원 입구에. 나무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귀신 나오는 집>이라는 간판이 한때 붙었던 식당.
5분여 내려가면 <귀신 나오는 집>이라는 간판이 한때 붙었던 식당이 나온다. 마침 지나는 할머니께 물었다. 정말 귀신 나왔는지.
“퇙도 없지, 퇙도 없고말고”
오른손을 가슴 쪽으로 휘익 가로질러 반원을 그리며 내리치며 아니란다. 말티고개에 공동묘지도 있고 예전에는 스산해서 아기가 죽으면 근처에 그냥그냥 버리고 그랬단다. 아마도 건물을 지을 때 아기 유골이 나와서 그런 말들이 나왔는데 전혀 사실무근이라고 딱 잘라 말한다. 한때 귀신 나오는 집으로 전국에 유명세를 떨쳤던 식당은 주인이 바뀌었다. 식당을 지나 고개 끝날 무렵 정말 한우고기 잘한다고 소문난 식당 간판이 보인다. 하지만 내게는 아쉽게도 지금은 한우 사 먹을 돈이 없다. 문득 텔레비전 <개그콘서트>에서 유행시킨 ‘소는 누가 키워’라는 말이 목구멍을 간질간질하다.
옥봉삼거리에서 말티고개가 끝나는 초전 대림 아파트까지 승용차로 10분 정도면 끝나는 거리지만 걸어서 30~40여 분이 걸렸다. 출퇴근뿐 아니라 시내로 가기 위해서도 무시로 지나는 고갯길. 나막신쟁이의 가족 사랑을 떠올리면 눈두덩이 붉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