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가 바뀌면 사람은 곧잘 다짐합니다.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마음을 세우기도 하고, 조용한 곳을 찾아 새출발을 준비하기도 합니다. 해돋이 명소도 좋지만, 의미를 품은 공간에서 마음을 다지는 일도 의미가 색다르고 깊습니다. 서울과 대전에 현충원이 있다면 통영에는 충렬사가 있습니다. 새해의 시작을 여기에서 출발했습니다.

통영 도심에서 멀지 않은 언덕 위, 충렬사는 늘 조용히 사람을 맞습니다. 들어서는 순간부터 공기가 달라집니다. 숨이 길어지고 발걸음이 느려집니다. 도시의 소리가 낮아지고 마음의 속도도 함께 내려옵니다. 이곳은 들어서는 순간부터 사람을 고르게 만드는 자리입니다.
돌계단에서 시작되는 충렬사의 시간

마당에는 300년을 넘긴 나무들이 서 있습니다. 계절보다 먼저 봄을 알리는 아름드리 동백이 저만치에서 반깁니다. 가지 사이로 떨어지는 햇살이 바닥에 고르게 내려앉습니다. 아직 봄 소식을 전하지 않습니다. 나무 아래를 걷는 동안 마음의 소음은 하나씩 사라집니다. 말없이 서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시간이 흐릅니다.

팔작지붕의 강한루 아래로 들어서면 붉은 기둥과 단청이 시야를 채웁니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모이고 몸의 중심이 안쪽으로 기울어집니다. 충렬사의 고요는 비어 있지 않습니다. 오래 쌓인 침묵이 공간의 깊이가 됩니다. 이곳에서는 서 있기만 해도 마음이 펴집니다. 급히 해야 할 일들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사당으로 올라가는 돌계단 아래에 서면 고개가 먼저 숙여집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렇게 됩니다. 계단 옆에는 오래된 돌 하나가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동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시간을 견뎌온 흔적처럼 보입니다. 계단을 오를수록 말은 줄어들고 생각은 정리됩니다. 발걸음이 닿는 소리마저 조용해집니다.

마당에는 하늘 높이 솟은 은행나무 두 그루가 호위무사처럼 당당하게 서 있습니다.

사당 안에는 이순신의 영정이 단정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화려한 장식은 없습니다. 절제된 공간이 오래 남습니다.

영웅을 만났다는 감정보다 책임을 끝까지 감당한 한 사람을 마주한 느낌이 남습니다.

마루에 잠시 머무르면 새해의 바람이 달라집니다. 더 많이 가지는 일이 아니라 더 곧게 서는 일이 먼저 떠오릅니다. 이곳에서는 소원이 작아지고 다짐이 또렷해집니다. 오래 머무를수록 말은 필요 없어집니다. 마음이 스스로 정리됩니다.
사당에서 내려오며 만나는 기록

사당을 내려오며 지나왔던 누각 옆 기념관으로 향했습니다. 팔사품이 전시된 공간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무공이 명나라에 전해지며 황제가 하사한 도독인과 곡나팔, 독전기 등 여덟 종류의 유물들이 이곳에 놓여 있습니다.


유리 진열장 앞에서 발걸음이 멈춥니다. 화려함보다 무게가 먼저 느껴집니다.

전시장 벽면에는 조선 수군의 훈련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깃발은 펄럭이고 배들은 전진합니다. 그림 속 시간은 멈추지 않습니다.

충렬사를 내려오는 길, 올라올 때보다 더 느려집니다. 언덕 아래로 내려와도 고요는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새해의 출발선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통영의 언덕 위, 충렬사에서 이미 시작했습니다. 오래 서 있기만 했습니다. 햇살이 격려하듯 머리 위로 기분좋게 쏟아집니다.
▣ 통영 충렬사
주소: 경남 통영시 명정동 충렬로 93
주차: 유료 / 선불 결제
관람시간 : (3월~10월)09:00~18:00 / (11월~2월)09:00~17:00
관람료: 어른 1,000원 /청소년 700원 /어린이 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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