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이야기

진천 초평호에서 아버지의 시간을 건네받다

에나 이야기꾼 해찬솔 2025. 11. 24. 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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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 초평호에서 아버지의 시간을 건네받다

늦가을, 붕어 한 냄비가 데워준 삶의 온도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던 1122일 오전 10. 우리 부부는 경남 진주에서 국도 33번을 따라 천천히 북쪽으로 올랐다. 일부러 빠르고 빠른 고속도로를 피해 일반국도로 향했다. 차 안은 조용했고, 창밖의 풍경은 늦가을 특유의 여백을 품고 있었다.

 

대화는 자연스레 우리 삶의 가장 깊은 곳으로 스며들었다. 아이들 앞날. 6~8년 뒤 다가올 정년. 이후에 우리가 서 있을 자리 등.

 

국도 위로 펼쳐진 산과 들, 강이 흐르는 풍경은 마치 이제는 천천히 삶을 이야기할 나이임을 조용하게 깨닫게 했다. 적막한 리듬 속에서 선친의 모습이 불쑥 떠올랐다.

 

어릴 적 부엌 한구석은 붕어찜 냄새와 소주 향이 늘 공존했다. 아버지가 붕어 한 점을 집어 천천히 씹던 모습. 민물 생선의 흙내를 싫어해 수저를 내던지던 어린 나.

 

선친의 나이에 이승의 시간을 멈춘 때와 지금의 내 나이가 같다.

 

오후 230미련집, 붉은 냄비 안에서 되살아난 아버지의 시간

초평호 붕어마을에 닿자 우리는 망설임 없이 <미련집>으로 향했다. 대를 이어 붕어찜을 내놓은 노포이다.

주문한 메뉴는 붕어찜과 메기매운탕. 넓은 양은 냄비에 시래기를 한가득 깔고, 붕어와 메기를 함께 넣어 부탄가스 버너 위에 올려주었다. 이미 한차례 주방에서 익혀서 나온 상태지만 버너에 불이 닿자 붉은 양념이 가장자리부터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양념들이 시래기 결을 붉게 적셨다. 김이 피어올라 냄비 전체를 흐릿하게 뒤덮는 순간 오래된 필름 속 장면처럼 선친이 내 앞에 다가왔다.

흙내가 싫다며 숨어 있던 어린 나는 어느새 사라지고 김 사이로 떠오르는 것은 소주 한 잔에 하루의 무게를 녹이던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한 숟가락을 떠 입에 넣었다. 볕과 바람에 온몸에 오롯이 품은 시래기 맛, 붕어에 밴 진한 양념, 메기의 담백한 결이 겹겹이 밀려왔다.

 

처음 맛보는 조합인데 낯설지 않았다. 입이 아니라 마음이 먼저 알아차렸다.

초평호 산책 20년 만에 마음이 머무른 자리

 

식당을 나와 걷는 초평호수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풍광을 천천히 보여주고 있었다. 바람 한 점 없고 수면은 거울처럼 잔잔했다.

 

구부러진 가지 끝에서 마지막 잎들이 햇빛을 받아 얇게 빛났다. 호수 너머 산자락은 겨울의 문턱에 선 색을 띠고 있었다.

“20년 전에 SGI 진천연수원 왔을 때 호수가 바로 아래 있었는데도 정작 제대로 보지도 못했네. 오늘은 참 넉넉하다.”

아내의 말을 말이 호수 위를 천천히 흘러갔다. 놓쳐온 계절, 지나쳐온 시간, 바쁘게만 흘러가 버린 삶의 조각들이 물결에 흔들리듯 떠올랐다. 호수는 아무 말도 없었지만, 우리를 반갑게 기다려준 듯 우리 마음을 조용히 받아주었다.

오후 4시 농다리 물은 흐르고 마음은 머무르고

 

오후 4시를 넘긴 시간, 농다리 돌길에 들어섰다. 1000년이 넘는다는 돌다리라는 소개문처럼 천년의 세월이 든든하게 얹혀 있었다.

돌 사이로 물이 흐르고 바람이 숲 내음을 품고 우리의 뺨을 어루만지며 지나갔다. 과거를 걷고 있지만 현재와 미래가 그 위에서 함께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효녀와 용마의 전설을 품은 다리. 세금천을 가르는 평안한 물결.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우리 삶의 무게도 조금씩 내려놓아졌다.

 

돌 위에서 잠시 멈추자, 아이들 걱정도, 정년 이후의 두려움도 물결 속으로 스며들 듯 부드러워졌다.

메타세쿼이아 길 황금빛이 암묵적으로 건네는 위로

 

농다리에서 벗어나 근처에 있는 황금빛으로 타오른 메타세쿼이아 길을 걸었다. 나무들은 호위무사처럼 양옆에 서서 우리의 긴 하루를 말없이 받아주었다.

 

이번에는 오가는 바람들이 늦가을의 마지막 소식을 들려주었다. 길은 길게 이어졌지만, 걷는 속도는 자연스레 느려졌다.

 

두 그림자가 나란히 황금빛 길을 따라 길게 늘어졌다. 함께 살아온 시간, 더불어 걸어갈 시간 모두가 길 위에서 황금빛으로 빛났다.

광혜원면에서의 조용한 저녁, 숙소에서 마주한 밤의 온도

해가 완전히 사라진 뒤 숙소가 있는 광혜원면 카페에서 샐러드와 샌드위치로 가벼운 저녁을 먹었다. 아내의 편안한 표정이 오늘 하루의 마침표를 찍었다.

 

숙소에서 창문을 열자, 밤공기가 느리게 스며들었다. 초평호의 정적, 농다리의 물소리, 메타세쿼이아 길의 황금빛, 그리고 붕어찜 냄비 위에 피어오르던 김. 오늘의 장면들이 하나씩 되살아났다.

 

붕어찜을 유난히 좋아하던 아버지. 그가 짊어졌던 삶의 무게. 하루의 피곤을 한 냄비 속에서 털어내던 모습. 이제 당신의 나이에 서 있는 나는 그 맛을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했다.

 

서너 시간을 달려 온 낯선 진천이 오래오래 남을 하루를 건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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