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엔 편지를, 청마 유치환과 통영중앙동우체국
“꿈으로 가득 찬 설레이는 이 가슴에 사랑을 쓸려거든 연필로 쓰세요~”
1983년 가수 전영록 씨가 부른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라는 대중가요가 흥얼거리는 요즘, 가을입니다. 가을은 메마른 감정을 촉촉하게 적셔주는 마법 같은 계절입니다. 가을, 연인에게 편지 5천 통을 보낸 청마(靑馬) 유치환(柳致環. 1908~1967)을 찾아 통영 중앙동우체국(당시 통영우편국)으로 향했습니다.
통영중앙동우체국은 이름처럼 통영 중앙에 있습니다. 통제영과 통영 중앙전통시장이 걸어서 5분 이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시내버스와 사람들이 오가는 분주한 길가에서 청마거리에 들어서면 이미 마음은 문학청년인 양 만년필을 긁적이고 싶어집니다.
먼나무가 붉은 열매를 햇살에 더욱 빛내며 걸음 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합니다. 먼나무 덕분에 걸음도 상쾌해집니다.
먼나무 아래로 작은 쉼터가 있습니다. 청마거리를 안내하는 표지석과 함께 <토영 이야길> 이정표가 우리의 걸음 세웁니다.
뒤편으로 청마 유치환 흉상과 함께 옆에는 <향수> 시비가 있습니다.
“나는 영락한 고독의 가마귀/ 창랑히 설한의 거리를 가도/ 심사는 머언 고향의/ 푸른 하늘 새빨깐 동백에 지치었어라//~희망은 떨어진 포켓트로 흘러가고 / 내 흑노 같은 병들어 / 이향의 치운 가로수 밑에 죽지 않으려나니 / 오오 저녁 산새처럼 찾아갈 고향길은 어디메뇨”
시심이 우리의 몸과 마음에 스르륵 스며듭니다.
주위 상가 한쪽에는 빛바랜 <식목제>라는 시도 붙여 있습니다.
“보라 오늘 / 보랏빛 장백산맥이 남으로 남으로 갈래 뻗은 / 아세아 동쪽 적은 반도의 산이란 산 메란 메엔 ~”
시인은 아름다운 시어로 우리의 감성을 촉촉하게 적셔주지만, 만주에서 발간된 만선일보(滿鮮日報) 1942년 2월 6일 자에 '대동아전쟁과 문필가의 각오'라는 제목으로 쓴 글 등에서 친일 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도 합니다.
여기 주위로 박경리, 윤이상, 전혁림, 이중섭, 김상옥 등 통영을 빛낸 예술인들의 흔적이 많습니다.
일방통행 길을 따라 차 하나 지나가는 골목으로 들어가면 중앙동우체국이 나옵니다.
우체국 맨 꼭대기에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태극기가 펄럭입니다.
인근 인도에 붙은 시인의 <깃발>이 절로 떠오릅니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 아아 누구던가 /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깃발의 아우성이 다시금 빨간 우체통 옆으로 우리의 발길과 눈길을 세웁니다.
“사랑하는 것은 /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이다. / 오늘도 나는 / 에머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복> 시구가 우리를 행복의 세계로 이끄는 기분입니다.
성인 남성과 여성 사이에 친구(?)가 가능한지는 모르겠습니다. <행복>이라는 시도 시인이 쓴 5천 통이 넘는 편지 중 하나입니다. 통영여중 국어 교사였던 시인이 ‘플라토닉(관념적) 사랑’을 나눴던 연인 이영도(1916~1976)를 처음 만난 곳도 통영여중입니다. 이영도는 남편을 사별한 뒤 딸 하나를 키우며 통영여중 가사 교사로 근무했습니다. 시인은 이영도를 만나 20여 년 동안 식지 않는 뜨거운 관념적 사랑을 나눴다고 합니다.
옆으로는 시인이 이영도 시인을 비롯해 지인들에게 5천여 통의 편지를 부쳤던 통영우편국이 있던 곳을 알려주는 안내판이 함께합니다.
꿈으로 가득 찬 설레는 가을, 편지를 써봅시다. 사랑하는 가족에게, 연인에게 말로 차마 표현 못 한 마음을 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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