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남명이다3- 남명이 찾은 지리산 기행 <유두류록>
지리산을 닮고자 떠난 조선 선비를 찾아서
지리산을 닮고 싶어 말년에 지리산이 보이는 산청 덕산에 산천재를 짓고 눈을 감은 이가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이다. 1558년(명종 13년) 58세에 남명은 12번째 지리산 산행 후 '유두류록((流頭流錄)'이라는 지리산 기행문을 남겼다.
남명 일행은 음력 4월 11일 합천 삼가 계부당을 떠나 진주를 거쳐 사천에서 배를 타고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14박 15일 일정이었다. 주요 일정은 사천 장암 쾌재정-사천만-곤양 앞바다-하동포구-삽암-도탄-화개에서 하선(下船)-쌍계석문-쌍계사-불일암-지장암-쌍계사-신응사-화개-악양현-횡포-청수역-칠송정-귀가이다. 지리산으로 떠나는 길은 진주목사 김홍, 전 고령 현감 황강 이희안, 전 청주목사 구암 이정, 안분당 이공량 등 40여 명이었다.
조선 시대 선비들의 지리산 유람 일번지로 만든 남명의 흔적을 따라 지리산을 찾았다. 이 글은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에서 옮긴 <남명집>을 길라잡이 삼았다.
조선 선비들 지리산 유람 1번지로 떠나다
하동읍 내에 들어서면 섬진강이 넉넉하게 먼저 반긴다.
강둑에는 금계국들이 줄지어 노랗게 물었다. 금계국을 따라 섬진강을 벗 삼아 걷다가 지리산 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소설 <토지>의 주 무대인 악양면 평사리 들녘이 나오고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한 <최참판댁>이 나온다.
<최참판댁>으로 가는 들머리 한쪽은 공사가 한창이라 어수선하다. 강 쪽으로 접근하기도 쉽지 않다. 멀찍이 차를 세우고 강 쪽으로 내려가자 공덕비 2개가 서 있는 옆으로 ‘섯바구’, ‘선바위’라고도 불리는 ‘삽암(鍤岩)’에 관한 안내판이 나온다. 고려 무신정권 때 한유한(韓惟漢)이 처자식을 이끌고 와서 은거하며 낚시로 소일했다고 한다. 후에 임금이 벼슬을 내리기 위해 신하를 내려보내자 창문으로 도망쳐 버렸다고 전한다.
삽암을 나와 지리산 쪽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화개장터 못미처 악양정이 나온다. 악양정은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1450∼1504)이 은거하면서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던 정자이다. 남명이 찾았을 때는 옛터만 있었다. 남명은 “선생은 바로 천령(天嶺) 출신의 유종(儒宗)이다. 학문이 깊고 독실하여 우리 도학(道學)에 실마리를 이어주신 분이다.”라며 그를 기렸다.
악양정을 나와 화개장터에 이르면 차 창문을 얼른 열게 된다. 쌍계사 벚꽃 10리 길이다. 벚꽃들이 팝콘처럼 고소한 하얀 꽃들을 피웠던 지난날은 볼 수 없다. 오히려 여름의 절정인 짙푸른 녹색을 향해 내달리는 무성한 초록 잎이 터널을 이루었다. 덕분에 차 안으로 들어온 맑은 공기는 일상의 묵은내를 금방 내쫓는다. 잠시 차를 세우고 초록 터널을 걷는다. 무성한 나뭇잎 사이를 비집고 햇살이 들어오고 초록 물이 금방이라도 뚝뚝 떨어질 듯하다. 초록빛으로 샤워한 듯 몸과 마음이 개운하다.
바위에 헛된 이름 새기기, 날아가 버린 새 그림자만도 못해
쌍계사로 향하는 새로 난 길을 따라 상점들이 즐비하다. 새 길이 아닌 옛길을 찾아 들자 커다란 바위 두 개가 계곡에 바짝 붙어 있다. 왼쪽 바위에 쌍계(雙溪)라 적혀 있고 오른쪽 바위에는 석문(石門)이라 새겨져 있다. 고운 최치원이 쓴 글을 새겼다고 전한다.
또한, 바위 곳곳에는 사람 이름 석 자가 어지러이 새겨져 있다. 남명은 오암으로 이동하며 돌에 뭇 사람들 이름이 새겨진 것을 보고는 “대장부의 이름은 마치 푸른 하늘의 밝은 해와 같아서, 사관이 책에 기록해두고 넓은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야 한다. 그런데 구구하게 숲속 잡초더미 사이 원숭이와 이리가 사는 곳의 돌에 새겨 영원히 썩지 않기를 구하려 하니, 이는 아득히 날아가 버린 새의 그림자만도 못한 것으로, 세상 사람들이 훗날 그것이 무슨 새인 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라며 바위에 헛된 이름을 새겨 후세에 남기려는 무모함을 비판했다. 쌍계사 대웅전 앞에는 고운이 쓴 글을 새긴 ‘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禪師大功塔碑)’가 있다. 좀 전 쌍계석문에서 보았던 글씨체와 완연히 달라 당황스럽다.
호로병 속 별천지 풍경, 보약 한 첩 지어 먹은 듯 개운
쌍계사를 나와 ‘호로병 속 별천지’ 신흥마을로 향했다. 찾아가는 길 역시 싱그러운 녹색 터널이다. 녹색 물이 소나기처럼 쏟아진다. 맑은 기운이 온몸에 착 감기는 기분이다. 보약 한 첩을 지어 먹은 듯 마을 입구에 이르렀을 때는 힘이 솟아났다.
마을에 이르면 수령 500년이 넘은 범왕리 푸조나무가 먼저 눈길과 발길을 끈다. 고운이 혼탁한 세상을 등지고 지리산으로 들어가면서 꽂아두었던 지팡이가 돋아 자란 나무라는 전설이 있다.
푸조나무에서 30m 정도 좀 더 위쪽으로 올라가면 고운이 세속에서 들은 비속한 말을 여기에서 씻었다는 ‘세이암(洗耳嵓)’이 나온다. 주위 풍광 덕분에 단잠을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머리가 맑아진다.
세이암에서 다시 왔던 쌍계사 벚꽃 10리 길과 악양정을 거쳐 고소산성 아래에 있는 한산사에 올랐다. 한산사 앞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산을 사이에 두고 좁다랗게 항아리처럼 펼쳐진 악양 평사리의 들녘이 풍성하다. 두 눈에 담고 오가는 바람은 귀에 담았다.
바람이 참 달다. 한산사를 내려와 동정호로 향했다. 숨은그림찾기 하듯 부자와 행운, 사랑, 행복 두꺼비를 찾아볼 수 있는 동정호는 두꺼비 서식지가 있는 습지 공원이기도 하다. 악양루에 오르자 풍광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동정호를 나와 남명이 덕산에서 악양이 명승지라는 말을 듣고 찾아가다 돌아왔다는 회남재(回南岾)로 향했다. 회남재에 들어서기 전 악양면 사무소 앞에는 작은 수구 막이 숲이 있다. 취간림이다. 공중전화부스 같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도서관이 여럿 있다. 아담한 숲에서 에너지를 충전한 뒤 회남재로 들어섰다. 고개는 굽이 굽은 길이다. 아스팔트 포장길이라 애마(승용차)의 노고 덕분에 편하게 주위 풍경을 두 눈에 담으면서 올라갔다. 더는 버스는 진입할 수 없다는 경고문이 나오면서 길은 좁아지고 아스팔트 길은 시멘트 길로 바뀌었다.
착하고 악한 것도 습관으로 말미암아
깊은 산속을 승용차를 타고 고개를 넘어가는 게 오히려 송구할 정도다. 고갯마루에 이르자 ‘회남정’이 나온다. 정자에서 지나온 길을 보았다. 굽은 길은 살아온 인생길을 닮았다. 더구나 이렇게 편하게 올라온 애마에게 고마움을 새삼 느꼈다. 숨은 이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어찌 내가 편안하게 이곳을 둘러보겠는가 싶어 고맙고 감사하다.
청학동으로 내려가는 길은 통제가 되어 묵계저수지로 내려가는 우회로로 내려왔다. 시멘트 포장길과 비포장길이 겹쳐 이어진 내려가는 길이다. 울퉁불퉁 차는 이리저리 흔들흔들. 남명은 “당초 위쪽으로 오를 적에는 한 발자국을 내디디면 다시 한 발자국을 내딛기가 어렵더니, 아래쪽으로 달려 내려올 때는 단지 발만 들어도 몸이 저절로 흘러내려 가는 형국이었다. 이것이 어찌 선(善)을 좇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고, 악(惡)을 좇는 것은 산에서 내려가는 것과 같은 일이 아니겠는가?”라며 사람의 습성을 떠올렸다.
회남재를 내려와 묵계저수지에서 숨을 고르고 옥종면 소재지를 지나 재현한 청수역으로 향했다. 유람을 마치고 돌아가는 남명 일행도 이곳에 들러 하루 묵었다. 그를 포함한 네 사람이 들기에는 방이 너무 작아 허리를 구부리고 들어가 다리를 펼 수도 없는 지경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에는 네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단잠에 빠졌다. “청학동에 들어가서는 마치 신선들이 된 듯해도 오히려 만족해하지를 않았고, 또 신응동에 들어가서는 바야흐로 신선들이 된 것 같았으나 오히려 모두 부족하다고 여기면서 ~ 뒤에 와서는 모두 좁은 방안에 몸을 굽혀 잠을 자면서도 또 그것을 자기의 분수로 달게 받아들이고 있다. ~ 착하게 되는 것도 습관으로 말미암는 것이요, 악하게 되는 것도 습관으로 말미암는 것임을 알게 한다.”
산을 보고 물을 보고 옛사람을 떠올리며 시대를 생각하자
이곳에서 1km 정도 가면 지족당(知足堂) 조지서(趙之瑞‧1454∼1504) 묘소가 있다. 남명은 글에서 한유한과 정여창, 조지서를 진정한 군자라 여기며 닮고자 했다. 지족당은 연산군의 스승이었다. 연산군은 세자 때 지족당이 공부를 소홀히 하면 엄격하게 훈육한 데 앙갚음으로 1504년 갑자사화 때 조지서를 먼저 죽였다. 조지서 묘소에서 바라보이는 들녘 사이로 비각이 보인다. 오천 정씨 정려각으로 조지서 부인의 정려각이다. 부인은 갑자사화로 한순간에 노비 신분으로 전락해 성 쌓은 부역에 동원되었으면서도 젖먹이를 안고 배 속에 아이를 품고 남편의 신주를 등에 업고 다니며 아침저녁으로 삼년상을 치렀다고 한다.
“산을 보고 물을 보고 옛사람을 생각하고 그 사람이 살았던 시대를 생각하자(간산간수 간인간세‧看山看水 看人看世)”라며 남명은 산수를 접하는 선비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알려주고 있다. 산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역사와 현실을 돌아보는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선비의 산수 유람이 어떠해야 하는 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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