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조식선생 발자취

다시 남명이다!(1) - 남명 조식 생가지와 뇌룡정, 용암서원을 찾아서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20. 7. 2.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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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남명이다!- 남명 조식 생가지와 뇌룡정, 용암서원을 찾아서

 

고리타분한 꼰대! 조선을 망가트린 성리학자…. 왜 다시 남명(南冥) 조식(曺植)인가?

역사의 고비마다 불의에 항거했던 우리 경남인 기질 속에는 남명 사상은 온전히 이어져 온다. 여느 성리학자나 조선 시대 선비와 달리 남명은 상무(尙武) 사상을 가졌다. 문(文)과 무(武)를 겸비한 국방을 걱정한 학자 남명의 제자들은 동북아국제전쟁(임진왜란) 때 홍의장군 곽재우, 정인홍, 김면 등이 분연히 의를 위해 떨쳐 일어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했다. 남명은 철저한 자기 수양인 경(敬)과 실천하는 의(義)를 행동으로 옮긴 지성인이었다.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생살여탈권을 쥔 임금에게 직언을 아끼지 않은 현실 비판자다.

경상우도를 대표하는 선비 남명 조식(1501~1572)과 경상좌도를 대표하는 퇴계 이황(1501~1570)은 동갑내기이다. 퇴계는 예(禮)와 인(仁)을 강조한 반면, 남명은 실천을 중시했다. 퇴계를 모르는 이는 드물지만, 남명은 아는 이가 드물다. 남명은 합천에서 태어나 처가살이한 김해와 진주, 의령, 하동, 산청 등 경상남도 전역에 흔적이 남아 있다. 겨레의 스승 남명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길은 우리 경남 정신을 찾아보는 길이다.

 

먼저 남명의 생가지와 배향하는 용암서원(龍巖書院), 뇌룡정(雷龍亭)이 있는 합천 삼가를 찾았다. 진주에서 대구로 가는 33번 국도를 따라가다 의령군 대의면에 이르러 빠져나왔다. 작은 면 소재지를 가로질러 다시금 양천강을 건너면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톳골(兔洞)이다. 남명교 앞에 서자 강이 마을을 에둘러 흐르는 사이로 농익은 봄 햇살이 자글자글 끓고 내리는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너른 들에 용암서원과 뇌룡정이 빛난다. 다리를 건너자 아름드리나무 한 그루가 두 팔 벌려 아늑하게 반긴다. 450년이 넘은 느티나무다.

나무 아래에는 남명의 시를 새긴 빗돌이 서 있고 옆에는 남명이 태어나고 자란 외가와 친가의 발자취를 따라 유적 탐방코스로 좋은 남명로(南冥路) 소개 선간판이 함께 한다.

시골 마을 어귀에 어김없이 자리한 느티나무가 있는 풍경이 주는 아늑함 덕분에 벌써 마음은 푸근해진다. 천천히 빗돌에 새겨진 남명의 시 홀로 선 나무를 읊다(咏獨樹)’를 읊자 느티나무가 나를 천천히 보듬어 준다. 무리를 떠나 홀로 있기에,/ 스스로 비바람 막기 힘들겠지./늙어감에 머리는 없어졌고,/상심하여 속이 타버렸네./아침이면 농부가 와서 밥 먹고,/ 한낮엔 야윈 말이 그늘에서 쉬네./다 죽어가는 등걸에서 무얼 배우랴?/ 마음대로 하늘에 떴다 가라앉았다 하네.//<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옮김 남명집>”

 

나무 옆에는 효자리(孝子里)’라 새겨진 <합천 외토리 쌍비>가 있다. 고려 말 나이 50세에도 불구하고 부친상()을 당하자 3년 동안 무덤을 지켰다는 이 마을 의정(醫正) 이온(李縕) 비석이다. 쌍비를 나와 곧장 서원과 뇌룡정으로 향하지 않고 마을로 걸음을 옮겼다.

마을회관에서 100m가량 안쪽으로 들어가면 <남명 조식 선생 생가지>가 나온다. 토담 길이 정겨운 골목으로 들어가자 죽단화가 담 너머로 노랗게 고개 내밀어 반긴다.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한 생가지가 나오는데 공사가 한창이다. 여느 위인처럼 남명도 출생과 관련한 신비로운 일화가 전해온다.

예언가가 훌륭한 인물이 태어날 것이라는 말에 남명 외할아버지가 자기 손자가 태어나길 마음속으로 기대하며 새로 집을 지었다고 한다. 남명의 부모가 처가에 와서 그 집에서 잠을 자는데, 누런 용 한 마리가 자기들의 방으로 들어오는 꿈을 같이 꾸었다고 한다. (진주문화연구소에서 펴낸 남명 조식(허권수 지음/지식산업사))’ 툇마루에 앉아 136쪽의 짧은 분량 속에 굵직한 남명의 일대기가 담겨있는 남명 조식을 읽었다. 발아래 고들빼기와 함께 햇볕에 노릇노릇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구웠다.

지나온 용원서원으로 향했다. 서원 바로 앞에는 전주 부윤으로 재직 중이던 이윤경에게 쓴 편지를 새긴 빗돌이 남명 흉상을 둘러싸고 있다.

편지에서 남명의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전주 부윤에게(與全州府尹書) ~ 띠 집이 시냇가에 있어 부엌에서 일하는 아이가 때때로 송사리를 잡아 오는데, 다만 그물이 없어 못가에서 땀만 흘릴 뿐입니다. 명주실이 있어야 그물을 짜 고기를 잡지요. 잡곡밥도 제대로 못 먹는데, 오히려 고기 먹을 생각을 했으니, 분수에 넘치는 짓이 아니겠습니까?~”

두 눈을 부릅뜨고 정면을 응시하는 중년의 남명 흉상 위로 푸른 하늘이 배경이 된다. 남명이 똑바로 바라보았던 현실 비판은 명종 임금을 천하의 고아로, 문정왕후를 과부로 일컬으며 준엄하게 비판한 일명 단성소(丹城疏)에 담겨있다. 남명 쉰다섯 살에 명종은 단성현감에 제수하자 여러 차례 벼슬만 사양했던 남명이 이번에는 강직한 직언을 담아 상소(을묘(1555)년에 단성 현감을 사직하며 올린 상소문(乙卯辭職疏)를 올렸다.

“~전하의 나랏일이 이미 그릇되었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했으며 하늘의 뜻은 이미 떠나버렸고 민심도 이미 돌아섰습니다. ~낮은 벼슬아치는 아래에서 시시덕거리면서 주색만을 즐기고, 높은 벼슬아치는 위에서 어름어름하면서 오로지 재물만을 늘리며, 물고기의 배가 썩어들어가는 것 같은데도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궁궐 안의 신하는 후원하는 세력 심기를 용이 못에서 끌어들이는 듯하고 궁궐 밖의 신하는 백성 벗기기를 이리가 들판에서 날뛰듯 합니다. 그들은 가죽이 다 해어지면 털도 붙어 있을 데가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전하께서는) 왕도(王道)의 법을 세우십시오. 왕도의 법이 왕도의 법답지 않으면 나라가 나라답게 되지 못합니다.~”

 

사직 소에서 남명은 조정의 관료들이 서로 당파 싸움에 국정은 뒷전이고 부패와 무능으로 국가가 위기에 몰린 상황이라며 왕이 왕답게 몸과 마음을 다잡고 행동하라고 꾸짖고 있다. 생살여탈권을 쥔 군주에게 누가 직언(直言), 입바른 소리를 바로 할 수 있는가. 빗돌에 새겨진 상소문을 한 자 한 자 천천히 읽는 동안 통쾌하기도 하고 살이 떨린다. 상소문을 뒤로하고 용암서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서원은 합천댐이 들어서며 1987년 지금 자리로 옮겼다.

()를 모은다는 솟을대문에 적힌 집의문(集義門)을 지나면 거경당(居敬堂)이 나온다. 뒤에 남명을 기리는 사당이 있다. 사당에는 처사(處士)’라 적힌 신위가 있을 뿐이다!

 

잠시 예를 올리고 뇌룡정으로 향했다.

오른쪽 기둥부터 '시거이룡현(尸居而龍見)', '연묵이뇌성(淵默而雷聲)'이라 적혀 있다. ‘가만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용처럼 승천하고, 연못처럼 잠잠하다가 때가 되면 천둥·번개 소리를 낸다.’라는 뜻처럼 꾸준히 실력을 쌓아 때를 기다린다는 말이다. 마루에 앉아 가져간 남명집남명 조식을 읽는다. 나는 함부로 나대지 말고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쌓고 있나 뒤돌아본다.

봄기운이 스멀스멀 올라는 오는 사이로 뇌룡정을 나와 주위 강변을 따라 걸었다. 마실 가듯 동네를 한 바퀴 천천히 걸어가며 시간 사치를 누리기도 좋을 듯하다.

삼가면 소재지로 향했다. 가는 길에 백의종군 중이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쉬어갔다는 괴정(槐亭) 쉼터에서 숨을 골랐다. 500년이 넘은 팽나무와 느티나무가 어깨동무하듯 길가에 서서 오가는 이들에게 그들의 곁을 내어준다.

하판상판지동마을 입구를 알리는 표지석이 나오는 삼거리에 이르자 조언형(남명 부친)과 숙부인 이 씨(모친) 묘소를 알리는 표지판이 나온다.

한적한 길을 승용차로 10여 분 들어가다 지동마을 앞두고 묘소로 가는 시멘트 임도가 나온다. 600m 더 들어가면 묘가 나오는데 차 하나가 겨울 지날 정도로 길은 좁지만 가파르지 않아 시간 여유가 있다면 둘러보기 어렵지 않다.

묘소를 둘러보고 다시금 마을 지동 저수지를 따라 벚꽃이 남겨준 꽃길을 드라이브한다. 코로나19로 갇혀 있던 마음이 활짝 열린 듯 상쾌하다.

삼가면으로 향하자 삼가면 소재지를 가로질러 흐르는 강 주위로 연분홍빛 벚꽃들이 남은 꽃잎을 바람 한 점에 한 움큼씩 흩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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