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흉터⓶
- 꽃 피워라 제주 4.3정신
눈물마저 죄가 되었던 대한민국 현대사의 흉터, 제주 4.3의 흔적을 찾아 4월 2일부터 4일까지 다녀온 역사탐방을 3회에 걸쳐 나눠 적는다. 역사탐방은 제주도 초청으로 경남을 비롯한 전국 14개 시도 파워블로거와 SNS기자단, 공무원 90여 명의 <제주 4.3 역사 바로 알기 역사탐방>에 경상남도 인터넷뉴스 <경남이야기> 명예기자 자격으로 다녀왔다. 팸투어 이야기를 3회로 나눠쓴다.
글 싣는 순서
1. 섬뜩한 진실과 마주하는 제주 4.3기념관
2. 꽃 피워라 제주 4.3정신
3. 4월 동백을 본다면 제주 4.3을 떠올려보자
정부의 공식 보고서인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는 ‘제주 4.3’을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 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한다. 제주 4.3사건으로 제주도 중산간 마을의 95%가 쑥대밭이 되어 사라졌고 제주도 인구의 10%에 이르는 3만 명의 제주 민간인들이 희생되었다.
꽃 피워라 4.3정신
이틀째인 4월 3일. 제71주년 4.3희생자 추념식 행사에 참석했다. 추념식이 열리는 제주4.3평화공원에 들어서자 하늘에는 까마귀들이 날아다니며 함께 추모한다.
까마귀와 더불어 공원을 거니는 데 청동의 사람들이 서 있다. 제주를 상징함과 동시에 4.3을 품은 ‘한라산’에서 ‘대지(미래)로 향하는 과정을 형상화한 강문석, 서성봉의 작품 <이젠>이다. ’이젠(시간적) 대한민국 가슴 아픈 역사를 딛고 미래(인권, 평화, 통일)로 나아감을 의미‘고 한다.
미세먼지 없는 해맑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공원은 거닐기 좋다. 팽나무에 앉은 까마귀가 평화롭게 보인다.
우리가 누구인지 왜 이렇게 되었는지 밝혀다오
추념식을 끝내고 일행은 봉안관으로 향했다. 햇살이 천정에서 내려오다 사각의 틀에 사방으로 튀었다. 왼쪽에는 유골을 봉안했고 오른쪽에는 4.3 당시 최대 학살 터였던 정뜨르 비행장 한쪽에서 발굴한 한 모습을 재현하고 전시한 공간이다. 정뜨르 비행장은 제주도를 오가며 이용하는 제주공항이다.
전시장 한 가운데에는 어두운 속에 뼈들이 엉켜있다. 발굴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세상의 빛에 온전히 노출된 우리, 우리가 누구인지 왜 이렇게 되었는지 밝혀다오.’
신혼여행과 가족 여행 등 십 수 번이나 제주를 찾고 제주공항을 이용했지만 4·3의 그림자를 밟고 있는지도 몰랐다.
4·3의 그림자를 딛고 있는 제주공항
전시공간을 나오려는데 어릴 적부터 안경을 써오고 있는 처지에 나오는 마지막에 전시된 안경이 눈에 들어온다. 안경에는 이런 안내문이 적혀 있다.
큰맘 먹고 비싼 안경을 샀습니다. 똑똑한 우리 아들 유학 가서 문물을 훤히 익히라고 사준 안경입니다. 그러나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고 잡혀간 아들은 이렇게 덩그너리 안경만 남겨놓았습니다. 꿈 한번 펼쳐보지 못하고…….
행방불명인표석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4·3 희생자 중 행방불명인 3800여명의 이름을 새겨 표석으로 세운 행방불명인표석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표석들이 부채꼴로 펼쳐지는 지점에 끌려가는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 조형물이 있다. 걸어가면서 뒤를 돌아보는 모습이 어찌나 처연하던지. 지금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육지 어느 곳으로 끌려가 조형물 앞에는 “~매형에게 부탁하였으니 소와 말을 잘 관리하여 주기를 부탁합니다.” 형무소에서 온 편지의 글귀가 새겨져 있다. 돌아오지 못한 이들은 이제 이름이나마 여기 한라산 품에 안겼다.
다시금 추념식이 열렸던 위령광장으로 향했다. 위패봉안실로 걸음을 옮기자 제주4.3사건 희생자영위라 적힌 비가 나온다.
영령들께 예를 올린 뒤 14,256위의 위패가 봉안된 곳을 찾았다. 무수히 많은 이름과 마을. 셀 수가 없다.
4.3 동백나무 심기 캠페인에 동참해 공원에 시도별로 동백나무 명패를 바닥에 박았다. 공원 한가운데에 있는 위령탑으로 향했다. 탑 주위는 4.3당시 희생당한 사람들의 이름과 성별, 나이, 사망일시와 장소를 적은 각명비가 나온다.
각명비 사이로 총 5개의 수의를 단순화한 <귀천>이 보인다. 어른, 남녀, 청소년 남녀, 어린 아기 수의를 뜻한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희생된 이들을 입히려는 수의다.
젖먹이 안고 죽으며 어머니가 들려주는 ’윙이 자랑‘ 자장가
<각명비>를 지나 주차장으로 향하는 데 달팽이형태로 벽이 있는 곳이 있다. 돌돌 말린 벽에 새긴 제주 자장가 ‘웡이 자랑’ 자장가를 읊조리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자장가가 끝나자 ‘비설’(飛雪)이란 모녀상이 나온다. 눈처럼 하얀 바닥에 젖먹이를 안은 여인 조각이다. 모녀상의 주인공은 평화공원 뒤편 오름으로 향하는 길에서 이처럼 발견되었다고 한다. 1949년 1월 6일 군인에게 쫓겨 두 살 난 딸을 등에 업고 피신하다 총에 맞아 숨진 변병생 모녀를 형상화 한 것이다.
장난감 자동차와 사탕 등이 놓여있는 애기무덤들
공원을 나와 4.3 당시 최대의 피해마을이자 소설 <순이 삼촌>의 배경장소인 북촌리 너븐승이 4.3유적지를 둘러보았다. 여름이면 피서객과 휴양객들로 북적이는 함덕해수욕장이 불과 2km 거리에 있는 유적지다.
유적지 입구 오른편에 봉분도 작은 봉분을 둘러싼 산담도 작은 애기무덤들이 나온다. 묘지 앞에는 검은 돌로 된 작은 탑이 세워져 있다. 묘위에는 장난감 자동차가 놓여 있고 사탕이 놓여 있다. 그날 희생되지 않았다며 아마도 내 어머니 또래였을지 모른다.
소설 <순이 삼촌>은 허구가 아니라 제주 4.3의 진실
애기무덤들 지나면 <순이 삼촌> 문학비가 나온다. 제주에는 윗사람이면 남녀 구분 없이 친근하게 모두 삼촌이라 부른다. 현기영은 소설 <순이 삼촌>을 통해 4.3사건의 참혹상과 후유증을 고발하고 오랫동안 묻혀 있던 사건의 진실을 문학을 통해 공론화시켰다. 붉은 피로 상징되는 송이 위에 눕혀져 있는 비석들은 당시 쓰러진 희생자를 떠올린다.
누운 비석에는 소설의 구절들이 새겨져 있다. “~두 아이를 잃고도 울음이 나오지 않은 것은 공포로 완전히 오관이 봉쇄되어 버린 때문이 아니었을까?~”
문학비를 둘러본 뒤 너븐승이 4.3기념관으로 향했다.
기념관에 전시실에 들어서자 죽은 엄마의 젖을 문 아기의 그림과 함께 “~ 더 이상 죽이지 마라/너희도 모두 죽으리라”로 끝나는 ‘북촌리에서’라는 시 한편이 눈길을 끈다.
그리고 전시실 한쪽에는 당시 숨진 이들의 이름이 3개의 기다란 기둥에 새겨진 추모 공간이 나온다.
‘평화와 상생의 꽃으로 피어나소서’ 라는 글귀가 이들의 넋을 달랜다.
“아이고~”
1954년 1월 23일, 제주도 북천읍 북촌리 북촌국민학교에서 곡소리가 울렸다. 경찰은 당시 이장을 비롯한 마을 주민을 끌고 간 뒤 다시는 4.3관련 집단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풀어 주었다. 이른바 ‘북촌리 아이고’ 사건이다.
이날 이 마을 출신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해 죽은 김석태의 장례를 하며 고인이 생전에 머물렀던 마을 구석구석을 순례하다 학교 운동장에 들어갔다. 사람들은 의식을 치르는 중에 5년 전 그 자리에 있던 죽음을 떠올렸다.
4.3과 관련 더욱 숨죽인 세월을 보낸 너븐승이 사람들
1949년 1월 17일 함덕에 주둔했던 2연대 3대대 군인들은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이게 한 뒤 군인과 경찰 가족을 제외한 436명을 집단 학살했다. 북촌마을은 후손이 끊겨진 집안이 적지 않아서 ‘무남촌(無男村)’으로 불리기도 했다. 해마다 섣달 열 여드렛날이 되면 명절과 같은 집단적인 제사를 지내고 있다.
죽음의 공포가 가득했던 운동장에 모인 사람들은 그 당시 죽음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었다. 설움이 복받쳐 ‘아이고’소리는 곡소리로 지역을 진동했다.
엄청난 피해를 보고도 북촌리 주민들을 비롯해 제주도민들은 이 사건에 대해 말 할 수 없었다. 4.3과 관련 더욱 숨죽인 세월을 보냈다.
문재인 대통령도 언급한 4.3희생자 위령비가 있는 하귀리
인기 연예인 이효리의 민박집 근처에 있는 하귀1리 교차로 근처로 향했다. 교차로 근처에서 좀 더 걸으면 위령단이 나오는데 호국영령비와 4.3희생자 위령비가 한자리에 있다.
지난해 제주 4.3 70주년 추념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은 추념사에서 이곳을 이렇게 언급했다.
“이념은 단지 학살을 정당화하는 명분에 불과했습니다. 제주도민들은 화해와 용서로 이념이 만든 비극을 이겨냈습니다. 제주 하귀리에는 호국영령비와 4.3희생자 위령비를 한자리에 모아 위령단을 만들었습니다. “모두 희생자이기에 모두 용서한다는 뜻”으로 비를 세웠습니다. 2013년에는 가장 갈등이 컸던 4.3유족회와 제주경우회가 조건 없는 화해를 선언했습니다. 제주도민들이 시작한 화해의 손길은 이제 전 국민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죽은 이는 부디 눈을 감고 산 자들은 서로 손을 잡으라
4.3희생자 위령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여기 와 고개 숙이라
섬나라 이 땅에 태어난 이들은 모두 여기 와서 옷깃을 여미라.
~ 죽은 이는 죽은 대로 살아남은 이는 살아있는 대로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채 허공에 발 디딛고 살아오기 어언 50여 년…….
~ 여기 모인 우리들은 이제 하늘의 몫은 하늘에 맡기고 역사의 몫은 역사에 맡기려한다. 오래고 아픈 삼채기를 더는 파헤치지 않으려 한다. 다만 함께 살아남은 자의 도리로 그 위에 한 삽 고운 흙을 뿌리려 한다.
~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모두가 희생자이기에 모두가 용서한다는 뜻으로 모두가 함께 이 빗돌을 세우나니 죽은 이는 부디 눈을 감고 산 자들은 서로 손을 잡으라. ~
다만 섬나라 이 땅에 태어난 이들은 모두 한번쯤 여기 와서 고개를 숙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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