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이야기

이순신? 아니 이순 장군!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18. 4. 2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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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도 이순신(李舜臣) 장군을 안다. 이순(李珣) 장군은 모른다. 부끄럽지만 조선 중기 실천하는 선비였던 남명 조식 선생이 사천에서 배를 타고 섬진강으로 거슬러 올라가 지리산을 유람하고 지은 유두류록에서 처음 알았다.

 


사천만

 

고려 충신 이순 장군은 고려 1361(공민왕 10)에 홍건적 20여 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 개성으로 쳐들어올 때 예부 상서로서 태주에서 이를 격퇴하고 1366년 강화도 교동에 왜구가 침입하자 물리치는 등의 전공으로 두 차례에 걸쳐 공신에 책록되었다. 1367년 신돈(辛旽)에 의하여 사천으로 유배당했다. 장군의 묘소와 세운 쾌재정이 사천시 축동면 구호리에 있다.

 


고려 충신 이순 장군이 지은 쾌재정이 있는 구호리에 들어서는 입구에 있는 해창정. 조선 후기에 설치한 일명 해창이라고도 하는 장암창이 있었다.

 

축동면은 조선말까지 진주목에 속했던 곳이다. 구호리는 남쪽으로 남해바다가 펼쳐져 있으며 마을 가운데로 중선포천이 바다로 흘러든다. 조선 후기에 설치한 일명 해창이라고도 하는 장암창이 있었다.

 


가산리 석장승

 

가산창이 근처에 있었다. 1760(영조 36)에 가산리로 옮겨간 후 이곳은 구해창이라 불렀다. 가산창은 서부 경남지역 8개 고을 조세를 거둬들여 서울로 옮겼던 곳이다. 1894년 동학혁명 이전까지 성시를 이뤄 가산오광대와 수호신이었던 석장승이 현재에도 옛 영광을 기억하고 있다.

 


고려 충신 이순 장군이 건립한 쾌재정 터가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은 남해고속도로 변에 접하고 있다.

 

구호 안산에 있는 정자인 쾌재정은 장군이 유배 중에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옛날에는 바닷물이 밑에까지 들어와 경치가 아름다워 많은 이들이 즐겨 찾았다고 한다. 남명과 퇴계,구암 등이 찾아 경치를 즐기며 노래한 곳이다.

 


고려 충신 이순 장군이 건립한 쾌재정 터에 후대에서 건립한 쾌재정은 한때 마을 경로당으로 쓰였지만 지금은 폐가로 버려져 있다.


특히 구암 이정 선생이 남명 조식 선생과 이곳에서 낚시를 하던 중 빨간색을 띈 물고기가 걸려 오자 나라에 국상이 난줄 알고 각자 행장을 차려 십수다리에서 짚신을 뒤엎는 것을 신호로 만나 상경키로 했으나 기다려도 오지 않아 구암 선생 혼자 상경하자 이미 남명 선생이 먼저 와 있더라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고려 충신 이순 장군이 출몰한 왜적을 물리치고 쾌재를 부르고 지었다는 쾌재정은 아쉽게도 현판에서만 느낄 수 있다.

 

곤양곤수를 재임한 관포 어득강은 아래와 같이 노래했다.

 

龍山飛翠渡江來 용산의 물총새 강 건너 날아 와서

訪古歸龍洞幾回 옛날의 귀룡동을 몇 번이나 찾았드뇨

會是麗朝豊沛地 일찍이 고려 때 풍패의 땅이었으니

千年王氣尙佳哉 천년의 왕의 기운 아직도 아름답네

 


쾌재정 터에서 바라본 풍경. 남해고속도로가 지나지만 옛날에는 바닷물이 밑에까지 들어와 경치가 아름다워 많은 이들이 즐겨 찾았다고 한다.

 

출몰한 왜적을 물리치고 쾌재를 부르고 지었다는 쾌재정은 임진왜란으로 불탔다. 이후 황폐되어 세미창이 있다가 1938년 김성환이 중건했으나 낡았고 비문만 남았다. 정자 바로 옆에는 500년이 넘은 푸조나무가 외로이 서 있다. 정자가 일본 제국주의 강점기 때는 구호간이학교로 활용되었다. 1960년대 태풍으로 허물어지고 구호국민학교는 새로 지어 옮겨지고 이 정자는 지붕에 스레트로 개축해 마을 경로당으로 사용되었다.

 


쾌재정 터에는 500년 넘은 푸조나무와 유래를 알려주는 비문이 남아 당시를 기억한다.

 

현재는 500년이 넘은 나무가 그날을 말없이 들려준다. 나무는 세월의 흔적을 옹이 자리가 깊이 패였다. 시멘트로 기력을 보전 중이다. 바로 아래에는 남해고속도로가 지나가 당시를 떠올리기 어렵다.

 


쾌재정 터에는 500년 넘은 푸조나무는 세월의 흔적을 옹이 자리가 깊이 패였다. 시멘트로 기력을 보전 중이다.

 

장군은 왕산 앞 강주섬을 바라보며 죽어서도 백성을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일명 분지등으로 불리는 구호리 산 40번지에 묻혔다. 장군의 묘소는 일제시대 도굴 당하고 비각 등은 주위에 흩어져 흔적만 남았다고 한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결에 설핏 왜적을 물리치며 쾌재를 부르는 장군의 통쾌한 웃음 소리라 들려온다.

 


남해고속도로에서 바라본 쾌재정 터. 당시의 흔적을 더듬기에 현장은 너무 빈약해 아쉬움이 남는다.

 

비록 당시의 풍광을 보존하지 못하지만 땅은 시공간의 기억을 담았다. 오늘 만난 과거를 품은 땅에 역사가 켜켜히 쌓였다. 시간을 안고 미래를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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