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이야기

호리병 속 별천지에서 돌아갈 길을 잃다-하동 범왕리 푸조나무와 세이암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17. 10. 28.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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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햇살이 눈 부시게 빛나는 날 호리병 속 별천지로 들어가 길을 잃었다. 하동 화개면 범왕리 범왕보건진료소 앞 버스정류장에 차를 세웠다. 신흥1교를 건넜다


지나온 길이 아름답게 푸른 하늘과 함께 따라온다. 저만치에서 백만 대군을 호령하는 장수를 연상시키는 높다란 나무가 어서 오라 손짓한다.

 

걸음은 쉽게 옮길 수 없다. 주변의 경치가 발을 잡는다. 시원한 개천 바람에 등 떠밀며 도착한 곳은 화개초등학교 왕성분교장.

 

학교 앞에는 우리나라 푸조나무 중에서 가장 큰 나무로 알려진 범왕리 푸조나무가 서 있다.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혼탁한 세상을 등지고 지리산으로 들어가면서 꽂아두었던 지팡이가 돋아 자란 나무라는 전설이 있다.

 

나무에 앉아 고운 선생의 호리병 속 별천지(壺中別天,호중별천)’을 조용히 음미했다.

 

東國花開洞壺中別有天(동국화개동 호중별유천)

仙人推玉枕身世欹千年(선인추옥침 신세훌천년)

春來花滿地秋去葉飛天(춘래화만지 추거엽비천)

至道離文字元來在目前 (지도리문자 원래재목전)

擬說林泉興何人識此機(의설림천흥 하인식차기)

無心見月色黙然坐忘歸(무심견월색 묵묵좌망귀)

長風生萬壑赤葉秋山空(장풍생만학 적엽추산공)

 

동방 나라 화개동은 항아리 속 별천지라네

선인이 옥침혈 밀어내니 이 몸과 세상이 문득 천년이라.

봄이 오니 꽃이 땅에 가득하고 가을이 가니 낙엽이 하늘에 날리네.

지극한 도는 문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이는 눈앞에 있었다네.

자연에 흥취 있다고 말들 하지만 어느 누가 이 기미를 알겠는가.

무심히 달빛을 쳐다보며 묵묵히 앉아서 돌아가는 것도 잊어버리네.

천지의 비밀을 말해 어찌 혀를 수고롭게 하겠는가.

강이 물을 버리니 달빛이 그림자 되어 내 마음과 통하네.

흩날리는 바람은 수많은 골짜기에서 일어나니 붉은 잎 가을 산과 하늘이라네.‘

 

나처럼 이 시를 음미한 이가 있다. 시진핑 중국 주석은 2015년 서울에서 열린 중국 방문의 해 개막식에 보낸 축하 메시지에서 고운 선생의 시구를 인용하며 한국의 아름다움을 칭송했다.

 

맑은 공기가 한껏 가슴 속으로 들어온다. 마음이 정갈해지는 기분이다. 학교 담벼락에 그려진 벽화를 따라 대성계곡 쪽으로 30m 정도 좀 더 위쪽으로 올라가면 세이암(洗耳嵓)’이 나온다.

 

고운 선생이 세속에서 들은 비속한 말을 귀로 씻었다고 전해져 온다. 계곡에서 목욕하는데 게가 선생의 발가락을 물었다. 게를 멀리 던지며 다시는 여기서 사람을 물지 말라고 했다고 하는데 이후에 게가 서식하지 않았다고 한다. 함양 상림공원에 뱀이 나타나지 않는 전설과 비슷한 내용이 이곳에도 전한다.

 

세이암이라 새겨진 글자가 보이지 않아 마침 지나는 할머니께서 손가락으로 일러주신다. 흐르는 물 때문에 많이 깎여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글자는 보이지 않았지만, 눈은 깨끗하게 안구 정화를 했다.

 

내 뒤로 투명한 햇살이 함께한다. 자연과 전설이 살아 숨 쉬는 비밀의 정원에 들어온 기분이다.

 

바람이 싱그럽다. 가만히 바람을 타고 들어오는 맑은 기운을 온몸으로 담았다. 흐르는 물소리가 한결 상쾌하다. 이 순간 이 호리병 속 별천지는 오롯이 나만의 것이 되었다.

 

농익어가는 가을에서 나무들이 마지막 남은 녹음을 싱그럽게 뿜어낸다. 가을바람 솔솔 분다. 마음속을 상쾌하게 지난다. 흘러가는 물에 막걸리 한 잔 생각이 간절하다.

 

가을 햇살이 첩첩산중을 넘는다. 문득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잊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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