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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여행-처음처럼? 처음이다!,진주지역 경남 최초를 찾아서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16. 6. 24.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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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휴대폰 좀 가져다줘~”

3주 전 화장실에서 볼일 보는 중에 급하게 아이를 찾았다. 참가비 무료에 선착순 마감이라 적힌 경남도민일보 기자와 독자의 만남 이벤트 알림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진주지역 경남 최초를 찾아서라는 주제였다. 문자로 참가 신청을 했다. 그리고 새신랑처럼 618일을 첫날밤처럼 기다렸다.

 


경남 진주 문산성당은 1900년에 설립된 마산 성당에 이어 천주교 마산교구에서는 두 번째로 100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61830여 명의 참가자와 함께 진주시 문산읍에 있는 문산성당을 먼저 찾았다. 문산시장 근처에 버스는 멈추고 50m가량 골목길을 지나자 한적한 기와집 뒤로 뾰족한 고딕 건물이 나오는 데 바로 문산성당이다. 문산성당은 1900년에 설립된 마산 성당에 이어 천주교 마산교구에서는 두 번째로 100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1923년 한옥으로 지어진 옛 성당은 현재 강당으로 용도를 달리해 사용 중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전통 서까래와 대들보 사이로 서양식 전등이 붙어 있다. 오른편에 초대 주임신부인 프랑스인 쥴리앙 마리오 (한국명 권유량(바오로) 신부를 비롯해 주임신부들의 사진이 붙어 있다. 권 신부는 1907년 찰방 관아였던 건물 10여 동과 부지를 사들여 성당으로 사용했다.

 


1923년 한옥으로 지어진 옛 문산성당은 현재 강당으로 용도를 달리해 사용 중이었다.

 

찰방은 조선 시대 국가 도로망의 중요 지점에 있어 관리들에게 교통편의()를 제공하고, 공문서 전달, 보급품 운송을 제공하면서 정보 수집과 검문검색을 수행한 종 6품 벼슬 이름이다. 찰방은 천주교인 색출도 했다. 제대(祭臺)로 사용한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옛 성당 정면에는 정찬문(안토니오)의 초상화가 붙어 있다. 정찬문도 천주교 신자에 관해 가장 혹독한 박해 중 하나로 꼽히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정찬문은 진주 포교에게 붙잡혀 온갖 혹독한 고문과 형벌을 받았다. 정찬문은 결코 종교 배반을 입에 담지 않았으며 굳건한 신앙을 고백했다고 한다. 나이 45세인 1867년 남강 백사장에서 참수형을 당해 시신을 사흘 동안 버려져 있었다. 친지들이 머리 없이 몸체만 있는 유해를 거두어 고향 인근에 장사를 지냈다. 무두묘(無頭墓)로 전해져 오던 이곳은 이제 천주교 성지가 되었다.

 


한옥의 옛 성당 뒤로는 1937년에 고딕으로 양식으로 세워진 현재의 성당이 서 있다.

 

한옥의 옛 성당 뒤로는 1937년에 고딕으로 양식으로 세워진 현재의 성당이 동서양의 조화를 이루는 듯 서 있다. ·서양 건물이 보기 드물게 한자리에 있기도 하고 천주교인들의 피눈물이 고인 역참 자리에 성당 건물이 들어선 역사의 현장이 아이러니하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0호인 진주향교(晋州鄕校)는 언제 지었는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799(신라 소성왕 원년)에 진주의 전신인 청주(菁州) 거로현(居老懸)을 국학(國學) 학생들을 위한 녹읍(祿邑)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문산성당을 나와 오늘날 공립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는 진주항교로 향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0호인 진주향교(晋州鄕校)는 언제 지었는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799(신라 소성왕 원년)에 진주의 전신인 청주(菁州) 거로현(居老懸)을 국학(國學) 학생들을 위한 녹읍(祿邑)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987(고려 성종6)에 지금의 의곡사 계곡에 향학당(鄕學堂)을 창건하고 중앙에서 교수(敎授)를 파견했다고 한다. 고려 말 1011년에는 사교당(四敎堂)으로 고쳐 지었다. 강감찬 장군의 부장으로 거란의 10만 대군을 무찌른 강민첨, 고려 후기 문신 정을보, 조선 태종의 최측근 하륜 등이 이곳에서 공부했다. 1398(조선 태조 7) 문묘를 지으면서 향교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홍살문을 지나자 세 개의 문이 나온다. 가운데는 영혼이 드나들고 사람은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 왼쪽 문으로 나온다. 백성들 풍속을 교화한다는 풍화루 밑을 지나서 심동섭 진주향교의 전교에게 직접 설명을 들었다.

 


가파른 126계단을 조심스럽게 밟으며 공자를 비롯해 성현을 모신 대성전으로 올랐다.

 

향교의 공간은 교육과 제례의 두 영역으로 나뉜다. 진주향교도 앞쪽에 교육 공간을 두고 제례 공간을 뒤쪽에 두는 건물 배치의 일반적 형태를 따르고 있다. 유생(儒生)들이 학문을 연마하는 명륜당과 일상생활을 하는 동재(東齋), 서재(西齋)는 교육 기능을 담당하는 공간이다. 공자와 선현의 위패를 모시는 대성전과 동무(東廡), 서무(庶務)는 제례 기능을 담당하는 공간이다.

 

가파른 126계단을 조심스럽게 밟으며 대성전으로 올랐다. 대성전에 모신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의 위패를 구경하고 나왔다. 1934년부터 현재까지 경로당으로 쓰이고 있는 진주경로당(옥봉동)에 이르렀다. 정오 무렵이라 어르신들이 식사하실 요량인지 상을 차리고 있었다. 난데없이 들이닥친 일행에게 싫은 기색도 없이 찬찬히 경로당 역사를 일러주신다.

 


1934년부터 현재까지 경로당으로 쓰이고 있는 진주경로당(옥봉동).

 

경로당을 나와 진주교회로 걸음을 옮겼다. 진주교회는 백정 신분 해방 운동의 시발점이 된 곳이기도 하고 진주지역 3·1 만세운동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를 냈던 '진주기미독립만세의거기념종탑'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형평사 제6회 전국대회 포스터

 

내 소싯적에 한분 본 것은,(...) 아무튼 구경꾼 속에서 백정이 딸을 하나를 잡아낸 기라요. 한사 결단 달아날라는 거를, 아 그러씨 장정 몇이 덤비드는 데야, 치마가 찢기 달아나고 속곳이 벗겨지고, (..) 그 이삔 가시나를 엎어뜨리놓고 장정들이 번갈아서 올라타고

이랴! 이놈의 소가 와 안가노! 함시로 엉덩이를 철벅철벅 때리는 기라요. 뿐이것소? 목에다 새끼줄을 걸고 네 발로 기게 하고 구경꾼 앞을 돌아댕기는데, 그 애비가 소개기를 가져와서 게우 풀려났지마는 좀 안된 생각도 들고"

안되기는 머가 안됐단 말이오? 백정은 사람 아닌께. 그놈들을 오냐오냐하고 내러벼두었다가는 칼 들고 소만 잡겄소? 사람도 잡을라 들 긴데? 올짝달짝 못하게 콱 기를 직이놔야지"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 나오는 백정 각시놀이에 관한 대목이다. 실제 일제강점기 때 딸의 소학교 운동회를 보러 갔던 어머니가 딸이 보는 앞에서 짐승처럼 재갈이 물리고 남자들이 올라타는 백정 각시놀이을 당한다. 어머니는 집에 돌아와 자살한다.

 


독립기념관에 전시 중인 형평운동 관련 자료.

 

백정은 태어나 호적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고 이름마저도 충이나 효니 예니 하는 글자가 들어가는 이름을 지을 수 없었고 돌 석(), 이름 돌(), 가죽 피()를 사용해야했다. 죽을 때는 상복과 지팡이도 사용 못 하고 삼베와 두건만을 사용해야 했다. 상여도 금지되고 자신들만의 격리된 곳에 묘지를 따로 만들어야 하는 등 태어나 죽을 때까지 각종 차별을 받았다. 나이가 아무리 많은 백정도 어린아이에게 존댓말을 사용해야 했다. 나치독일 때 유대인들처럼 가슴에 별을 단 옷을 입었듯 남자는 상투를 틀지 못하고 여자는 비녀를 꽂지 못했다. 한눈에 봐도 백정임을 드러내야 하는 억압과 차별을 500년 세월 속에서 받아왔다. 형평운동은 이른바 사람이되 사람대접 받지 못했던 백정을 해방하고자 했던 인권운동이다.

 


 1905년에 설립된 진주교회는 백정 신분 해방 운동의 시발점이 된 곳이기도 하고 진주지역 3·1 만세운동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를 냈던 '진주기미독립만세의거기념종탑'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1905년에 설립한 진주교회 초창기에는 일반인들과 백정들이 따로 예배를 보았다. 1909년 카를 목사 후임으로 온 라이얼(한국명 나대벽) 목사는 '하나님 앞에서는 귀하고 천안 이가 없다백정들도 일반인들과 함께 예배를 보아야 한다'며 일반인들과 백정들은 함께 동석 예배를 하도록 했다. 목사의 뜻을 따르던 신도를 제외한 나머지 신자들이 동석 예배를 거부하고 예배당을 나가버렸다. 이후 화해해 같은 해 81일부터 함께 모여 예배를 보았다. 이 사건은 하느님 앞에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사상을 확인하고 똑같은 인간으로 대우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14년 후 형평운동으로 발전했다.

 


1905년에 설립한 진주교회 초창기에는 일반인들과 백정들이 따로 예배를 보았다. 그러나 1909년부터 하느님 앞에서는 귀천이 따로 없다.’며 진주에서 최초로 일반인들과 백정들이 함께 예배를 보았다.

 

이를 계기로 백정들의 신분해방 운동인 형평 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졌다. 1923저울’(저울대 형(), 평평할 평())처럼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형평사를 조직했다. 1935년에 이름과 성격이 바뀌기까지 13년간의 인권 운동을 펼쳤다.

 

진주교회를 둘러보고 점심은 각자 인근 중앙시장에서 해결하도록 했다. 만 원 한 장씩을 받은 참가자들은 자신들의 취향에 따라 생선탕을 잘하는 송강식당, 진주비빔밥으로 유명한 제일식당, 천황식당 등으로 향했다. 나는 대호김밥으로 갔다. ‘진주대첩 비빔밥이라는 선전 문구에 혹해서 시켰더니 양도 적고 여느 비빔밥과 다르지 않아 실망이 컸다. 꽃밥 또는 칠보화반으로 불리는 진주비빔밥은 특히 임진왜란 진주성 전투에서부터 유래됐다고 한다. 놋쇠그릇에 나물과 밥의 7가지 색이 연출하는 화려함과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기대가 커서인지 실망은 더 컸다.

 


일제강점기 만들어진 옛 진주역 차량정비고

 

점심을 먹고 난 뒤 일제강점기 만들어진 진주역 차량정비고를 둘러보았다. 지금은 가좌동으로 옮겨간 진주역사는 식당으로 변했고 식당 뒤편의 차량정비고는 한국전쟁 당시의 총탄 자국이 갈색 벽돌 속에 무덤덤하게 지난 이야기를 증언하고 있다. 차량정비고를 나와 진주성으로 향했다.

 


세계 최초로 여성을 모신 사당인 의기사.

 

공북문을 지나자 오늘 안내를 맡은 <경남의 숨은 매력>의 저자 김훤주 갱상도문화공동체 해딴에 단장은 우리를 한국 최초 아니, 어쩌면 세계 최초로 여성을 모신 사당인 의기사로 곧장 데려갔다. 논개를 모신 의기사 앞에서 사당에는 오른쪽에는 다산 정약용의 중수기, 매천 황현의 시판이 걸려있다. 왼쪽에는 진주기생 산홍의 의기사감음(義妓祠感吟)’ 시판이 걸려있다.



의기 논개 영정.

 

천년토록 의로운 진주/쌍묘에다 높은 누각 있나니/부끄러운 인생들이 한가한 날에/피리와 북소리로 너절히 노니네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진주기생 산홍은 재색이 모두 빼어났다. 이지용이 천금을 주고 불러 첩으로 삼고자 하였다. 산홍은 사양하며 세상에서 대감을 오적의 우두머리라 합디다. 첩은 비록 천한 창기이오나 자유로이 살아가는 사람이니 무슨 이유로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 하니, 이지용이 크게 화를 내어 두들겨 팼다.’고 한다. 매국노 이완용에게 절대 뒤지지 않는 이지용의 요구를 거절한 논개의 후예 산홍의 절개가 느껴진다.

 


논개를 모신 의기사 앞에서 사당에는 오른쪽에는 다산 정약용의 중수기, 매천 황현의 시판이 걸려있다. 왼쪽에는 진주기생 산홍의 의기사감음(義妓祠感吟)’ 시판이 걸려있다.

 

촉석루에 올라 더위를 식힌 뒤 진주성 촉석문 앞에 있는 형평기념탑을 둘러보왔다. 두 개의 나란히 있는 기둥 모양이 마치 파도를 헤치고 나가는 뱃머리 형상으로 있는 탑은 전국 각지 1,500여 명의 후원으로 19961210일 세계인권 선언의 날 세워졌다.



진주성 촉석문 앞에 있는 형평운동기념탑

 

공평(公平)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愛情)은 인류의 본량(本良)이라.

1923424일 이 곳 진주에서 저울()처럼 공평()한 사회를 만들고자 한 선각자들이 모여 형평사(衡平社)를 창립하였다. 형평사는 각지의 성원에 힘입어 전국 조직으로 자라면서 1935년까지 평등 사회를 이루려는 활동을 펼쳤다.

멸시와 천대에 시달리던 백정들과 그들의 처지에 공감한 분들이 힘을 모아 펼친 형평운동은 수천 년에 걸친 신분 차별의 고질을 없애려는 우리 나라 인권 운동의 금자탑이다. 누구나 공평하게 인간 존엄을 누리고 서로 사랑하며 사는 사회를 만들자던 형평운동의 높은 이상은 오늘날 아직도 이루지 못한 인류의 꿈으로 남아 있어서 그때의 운동이 더욱 돋보인다.

이제, 70여 년 전 어둡고 힘겹던 시절에 거룩한 인간 사랑의 햇불로 타올랐던 형평운동의 정신을 드높혀 기리고 아름답게 꽃피울 수 있기를 바라면서 뜻있는 분들의 열의와 정성을 모아 유서 깊은 진주성 앞에 이 탑을 세운다.‘



 진주시는 진주대첩기념광장을 만들면서 이 형평운동기념탑을 옮기려고 한다. 백정이라는 신분의 굴레로 성안에 살 수 없었던 한 맺힌 영혼을 달래기 위해 진주성 앞에 세운 의미를 없애려고 한다.(사진은 서울대 규장각 소장본 19세기 진주성도)

 

지금 진주시는 진주대첩기념광장을 만들면서 이 탑을 옮기려고 한다. 백정이라는 신분의 굴레로 성안에 살 수 없었던 한 맺힌 영혼을 달래기 위해 진주성 앞에 세운 의미를 없애려고 한다. 둘러본 역사의 현장에서 만난 진주 정신을 허투루 여겨 에나 서글프다. 결국, 역사는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망친다. 처음 이곳에 탑을 세운 의미를 제대로 살릴 수 있어야 한다. 처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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