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최초로 의병 일으킨 경남 의령을 찾아서
“의병, 의무병 아닌가요?”
며칠 전 20대에게 들은 의병에 관한 대답이다. 나 역시 명확하게 의병을 정의하지 못해 사전을 찾았다. 의병(義兵)은 ‘옛날에 나라를 지키려고 백성들이 스스로 일으킨 군대(『보리 국어사전』)’를 뜻한다. 민중 스스로 외적에 대항해 싸운 구국 민병인 셈이다. 동북아국제전쟁(임진왜란)과 구한말 을미사변과 국권 상실 전후의 의병 활동이 가장 활발했다.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붉은 옷의 장군이라는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라 칭하고 임진왜란 때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 장군.
의병을 기념하는 의병축제가 열리는 경남 의령으로 22일과 24일 다녀왔다. 22일은 내가 일하는 산청 장애인생활복지시설 내 장애인 11명과 나들이였다면 24일은 아내와 막내아들과 함께한 나들이였다. 동북아국제전쟁 때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에 망우당 곽재우 장군이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던 음력 1592년 4월 22일(양력 6월 1일은 의병의 날이다)을 기념하는 축제의 의미를 제대로 알기 위해 차 안에서부터 아내와 막내에게 의병에 관해 설명을 시작했다.
곽재우 장군과 17 장군의 위훈 기리고 영혼을 추모하기 건립한 의병탑은 횃불처럼 서 있는 양쪽 기둥 사이에 18개의 하얀 둥근 고리가 있다.
충익사 의병탑 근처에 차를 세웠다. 의병탑에 불을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곽재우 장군과 17 장군의 위훈 기리고 영혼을 추모하기 건립한 탑은 횃불처럼 서 있는 양쪽 기둥 사이에 18개의 하얀 둥근 고리가 있다고 설명해도 아이는 힐긋 보고 지나간다. 곽재우 장군을 모신 사당인 충익사로 들어갔다. 홍살문을 열고 곧장 내달리는 아이는 경내 넓은 마당에서 잠시 걸음을 세운다. 500년이 넘은 가장 오래된 모과나무에서 아내가 같이 사진 찍자고 권해도 아이는 딴청이다. 모과나무는 원래 의령군 가례면 수성리에 있던 당산목(堂山木)을 충익사 정화사업을 하면서 옮겨 심은 것이다.
망우당 곽재우 장군을 모신 충익사에서 향을 피운 내 옆에서 아이는 흰 국화 한 송이로 장군을 비롯한 영령을 추모했다.
붉은 자목련이 한 쪽에 서 있는 충익사에서 향을 피운 내 옆에서 아이는 흰 국화 한 송이로 장군을 비롯한 영령을 추모했다. 충익사 옆에는 구골나무가 큰 곰이 웅크린 듯 서 있다. 충익사를 나오자 가지가 잘린 은행나무가 햇살에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 앙상한 나무 사이로 초록빛 잎사귀들이 생명을 틔워내고 있었다. 기념관에 들어섰다.
충익사 내 기념관에 있는 의병창의도(義兵倡義圖)
기념관 오른편에 들어서자 의병창의도(義兵倡義圖)가 나온다. 1592년 음력 4월 13일 전쟁이 발발하고 채 열흘이 지나지 않은 4월 22일 곽재우 장군이 먼저 개인재산을 털어 군비를 마련하고 사노비 10여 명을 이끌고 의병을 일으켜 2천 명으로 점점 늘어났고 한다. 의병창의도 맞은편에 백마에 붉은 옷을 입은 장군이 보인다.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붉은 옷의 장군이라는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라 한 장군의 기상이 느껴진다. 말년에 창녕에서 ‘망우정’을 짓고 낙향한 장군을 기리는데 하얀 고무신 한 켤레가 댓돌에 있다. 아이는 의병창의도를 퍼즐 맞추기에 바쁘고 아내는 백마 조형물을 타고 그 당시로 내달렸다.
의령 의병박물관 앞 활쏘기 체험장.
기념관을 나와 의병박물관으로 향했다. 정동리 공룡 발자국 화석도 그냥 지나쳐 아이는 각종 체험행사가 펼쳐진 마당으로 쏜살같이 갔다. 엄마를 따라 활을 쏘려고 시위를 당겨보려는데 아이는 여의치 않은 모양이다. 화살을 걸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성을 공격하는 투석기(投石機)를 본뜬 체험장에서 제기를 4개씩 올려 돌 대신 쏘아 올리는데 무덤덤한 표정의 아이는 재미나고 신기한지 여러 번 투석기로 제기를 하늘로 날렸다.
“북, 쳐봐도 돼요?”
체험하는 북이라 맘껏 쳐보라는 말에 아이는 신났다. “둥~둥~둥” 북을 치는 아이는 “스트레스가 풀린다”며 연신 즐거운 표정이다. 북을 치는 밝은 표정의 아이와 달리 아주 강건한 표정으로 장군은 생가 근처 느티나무에 북을 매달아 치면서 의병을 모으고 훈련을 시켰다는 현고수(懸鼓樹)를 훔쳐보았다. 북 치기를 그친 아이는 엄마와 널뛰기를 해보자고 청하지만 몸무게 차이가 나는 아내는 두렵다고 발을 올리지도 않았다.
조국의 근대화에 앞장선 사업가이면서 광복운동에 헌신했던 애국지사인 백산 안희제 선생이 독립운동을 했던 당시 들고 다니셨던 가방.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백마 위에서 붉은 옷을 입고 힘차게 싸움을 독려하는 장군의 조형물 왼편으로 의령지역의 고대부터 현대까지 간략하게 살필 수 있는 전시실부터 둘러보았다. 전시실 나오는 출구에 못 미쳐서 낡은 가방 하나가 전시되었다. 백산 안희제 선생이 독립운동을 했던 당시 들고 다니셨던 가방이란다. 1885년 의령군 부림면 입산마을에서 태어난 백산 안희제 선생은 조국의 근대화에 앞장선 사업가이면서 광복운동에 헌신했던 애국지사다. 사업하면서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기 바쁘던 선생은 1942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 후유증으로 1943년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도 항일정신과 조국 광복에 희망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단순히 지금 현재 우리나라 최고의 기업을 창립한 의령의 또다른 부자와는 다른 삶을 사신 분이다.
의병박물관 내에 곽재우 장군을 비롯해 함께 싸운 윤탁, 박사제, 오윤 등 18명의 장군 이름이 새겨진 팻말을 지나가면서 함께 싸운 이름 없는 조선 민중들의 넋을 기렸다.
전시실을 나오자 곽재우 장군의 진품 유물을 전시한 전시실이 나온다. 들어가자 왼쪽 벽면에 ‘임진왜란?’이라고 적힌 안내문이 걸음을 붙잡는다. ‘1592년 4월 13이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여 1598년 11월까지 약 7년간에 걸쳐 벌인 전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임진전쟁)이라 하고, 일본에서는 ’분로쿠· 게이쵸노 에끼‘라고 하며 중국에서는 ’항왜원조‘ 라고 한다’고 적혀있다. 왜란(倭亂)이 아니라 분명 전쟁으로 규정해야한다. 단순히 왜놈이 일으킨 난리가 아니다. ‘전쟁의 원인, 전개과정,영향 등이 차근차근 설명돼 있어 좋은 역사 교육의 현장이다. 곽재우 장군을 비롯해 함께 싸운 윤탁, 박사제, 오윤 등 18명의 장군 이름이 새겨진 팻말을 지나가면서 함께 싸운 이름 없는 조선 민중들의 넋을 기렸다.
의령 소바(메밀국수)는 면을 적셔 먹는 일본식 메밀소바와 달리 멸치로 우려낸 국물에 고명을 얹어 먹어 장터국수식으로 이제는 의령의 명물이 되었다.
곽재우 장군이 의병을 일으킨 지 보름이 채 못 된 5월 4일 기강에서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 이순신 장군의 함대가 최초의 해상전투인 옥포해전에서 첫 승리를 거두기 바로 전날이었다. 기강전투 승리 소식으로 군세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장군의 장검의 서슬퍼린 빛이 힘을 모아 나라를 싸우자던 당시의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곽재우 장군의 의병활동은 다른 지역의 의병활동을 자극하고 파급하는 효과를 불러 일본군의 전라도 점령을 막기도 했다.
지난 22일에는 이른 시각에 예약하고 먹었지만, 점심때를 훨씬 넘긴 오후 2시에도 읍내 시장 내 ‘의령소바(메밀국수)’를 먹기 위해 줄을 선 대기자들의 행렬은 기다랗다. 근처 고깃집으로 자리를 옮겨 점심을 먹었다. 의령소바의 시초는 해방 직후, 경남 의령군 부림면 신반마을에 살던 한 할머니가 해방되자 일본 등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귀국자들에게 메밀국수를 대접했던 것이 유래했다고 한다. 면을 적셔 먹는 일본식 메밀소바와 달리 멸치로 우려낸 국물에 고명을 얹어 먹어 장터국수식으로 이제는 의령의 명물이 되었다.
의령 망개떡은 쫄깃한 떡에 팥을 소를 넣어 망개(청미래덩굴) 잎으로 싼 떡이다. 일본 강제점령기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 사진은 망개떡을 만드는 모습.
점심을 먹고 곽재우 장군 생가를 향했다. 깜박하고 시장에서 ‘의령망개떡’을 사지 못했다. 의령 망개떡은 떡갈잎으로 싼 떡이라는 일본 떡인 카시와모찌(かしわもち·柏餅)를 닮았다. 일본에서는 양력으로 5월 5일 단오를 쇠고 이날 먹는 절기 음식이다. 이날 일본인들은 묵은 잎을 달고 있다가 새잎이 나오면 그때 떡갈잎으로 싼 떡을 먹음으로써 자손이 대를 이어 번창하기를 기원하며 먹는다고 한다. 의령 망개떡도 쫄깃한 떡에 팥을 소를 넣어 떡갈잎 대신 망개(청미래덩굴) 잎으로 싼 떡이다. 일본 강제점령기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
삼성그룹을 창업한 이병철 생가
아쉬움을 달래며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 생가 앞을 지나 곽재우 장군 생가로 곧장 향했다. 1552년 경상도 의령현 세간리에 있는 외갓집에서 태어났다. 당시 혼인 풍습이 ‘장가’ 가는 것이다. 장군의 아버지인 곽월은 본래 살던 대구 현풍에서 처가가 있는 이곳으로 이주해 장군을 낳은 것이다.
망우당 곽재우 장군 생가.
생가 주위는 작은 공원으로 꾸며져 있어 아이는 다시금 북채를 잡고 북을 쳤고 나는 말 조형물에서 말을 탔다. 장군의 기마상 아래 벽돌블록 사이로 냉이가 햇볕에 고개들어 꽃피우고 있었다. ‘당신께 나의 모든 것을 드립니다.’라는 꽃말을 가진 냉이처럼 당시의 조선 민중과 장군은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 놓고 싸웠다고 생각하니 냉이 꽃이 허투루 보이지 않는다.
곽재우 장군 생가 앞에는 수령이 500년이 넘는 거대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연두잎이 햇살에 살랑살랑 춤추는 모습이 정겹다.
생가 앞에는 거대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현고수와 함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는 수령이 500년이 넘는다. 연두잎이 햇살에 살랑살랑 춤추는 모습이 정겹다. 대문채로 들어서자 잘 다듬어진 잔디 한편에 죽단화가 노랗게 피었다. 사랑채로 올랐다. 의병창의도처럼 시간을 거슬러 올라 장군의 기상과 의병들의 의를 떠올렸다.
사랑채에 앉아 당시를 떠올리는데 문득 박물관에서 본 장군의 심정이 생각났다.
‘당신께 나의 모든 것을 드립니다.’라는 꽃말을 가진 냉이처럼 당시의 조선 민중과 곽재우 장군은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 놓고 싸웠다.
“만약 모두가 마음을 합하여 정암진에서 저들을 막는다면, 우리 마을은 지킬 수가 있을 것이오. 어찌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죽음을 기다린단 말이오.” (박동량의 『기재사초』에 기록된 정암진 전투를 앞둔 곽재우 장군의 심정 중에서)
불의를 보고도 아무 일도 하지 않은 나 자신을 장군의 말씀이 죽비처럼 내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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