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 28일, 산청 성심원 동료들과 창녕 영산 마늘밭에서 수확 봉사를 마치고 순대전골로 점심을 먹었습니다. 다시 돌아가는 길, 원장님이 지나는 길에 일붕사에 들르자고 했습니다. 예정에 없던 짧은 샛길이었습니다. 그렇게 마늘밭의 흙냄새를 안고 의령 깊은 산자락으로 들어섰습니다.

의령 일붕사는 찾아가는 길부터 조금 멀었습니다. 의령 안에서도 한적한 산자락 깊숙한 곳이었습니다. 의령읍에서 승용차로 30분이 넘는 길은 조금 돌아가고, 마음은 조금 비워야 했습니다. 쉽게 닿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길은 조금 돌아가고, 마음은 조금 비워야 했습니다. 불편함을 지나 도착한 자리라 그런지, 일붕사 앞에 서는 순간부터 마음의 숨이 한결 느려졌습니다.

저는 불교 신자는 아닙니다. 그런데 사찰을 찾으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절집 마당에 들어서면 목소리가 먼저 작아지고, 걸음이 저절로 낮아집니다. 믿음의 이름은 달라도 고요 앞에서 쉬고 싶은 마음은 서로 닮아 있는 듯합니다.
오지 같은 길 끝에서 만난 바위 품은 절집

일붕사는 바위가 먼저 눈에 들어오는 절집이었습니다. 높은 암벽이 병풍처럼 절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절벽 사이로 푸른 덩굴이 흘러내리고, 그 아래 단청 고운 전각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지은 건물과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던 바위가 서로 밀어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있는 듯했습니다.
일붕사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 뿌리는 신라 성덕왕 때인 727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중국과 인도의 성지를 순례하고 돌아오던 혜초 스님이 꿈속에서 기암절벽 아래 환하게 웃는 지장보살을 보았다고 합니다. 혜초 스님은 귀국 뒤 전국의 명산을 찾다가, 꿈에서 본 절벽과 닮은 봉황산을 만나 사찰을 세웠다고 합니다. 처음 이름은 성덕사였다고 합니다. 바위를 다시 올려다보면, 눈앞의 절벽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의 꿈이 머물렀고, 누군가의 기도가 기대어 있던 자리처럼 보였습니다.

입구의 사천왕문을 지나며 고개를 들었습니다. 천장에는 용이 구름 속을 휘돌고, 양쪽에는 사천왕상이 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붉고 푸른 색은 화려했지만 어지럽지 않았습니다. 오래된 약속처럼 제자리를 지키는 색이었습니다. 문 하나를 지나왔을 뿐인데, 바깥 세상의 소리가 조금 멀어졌습니다.

마당으로 들어서자 흰 탑과 전각, 바위 절벽이 한 장면 안에 펼쳐졌습니다. 햇살은 뜨거웠고 하늘은 맑았습니다. 사람들은 사진을 찍고, 계단을 오르고, 잠시 멈춰 절집을 바라보았습니다. 누군가는 두 손을 모았고, 누군가는 그저 조용히 둘러보았습니다. 기도의 방식은 달라도, 그 순간만큼은 모두 같은 그늘 아래 머무는 사람들 같았습니다.
돌탑들도 오래 눈에 남았습니다. 작은 돌들이 하나하나 포개져 탑이 되었습니다. 바람을 견디려면 돌 하나의 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서로 기대고, 서로 눌러 주고, 서로의 빈틈을 메워야 합니다. 돌탑 앞에서 사람살이도 저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높이 오르기보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서로의 무게를 나누는 일 말입니다.
동굴법당과 폭포, 커피 한 잔까지 마음을 씻다


법당 안으로 들어서자 또 다른 시간이 열렸습니다. 벽면을 가득 채운 작은 불상들, 천장 아래 매달린 이름표들, 가운데 고요히 앉은 부처님의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촛불은 작게 흔들렸고, 꽃은 말없이 놓여 있었습니다. 밖에서는 햇살이 눈부셨지만 안쪽의 빛은 낮고 부드러웠습니다. 기도문을 잘 알지 못해도 괜찮았습니다. 그저 잠시 서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속 먼지가 가라앉는 듯했습니다.


의령군 문화관광 안내에 따르면 일붕사는 봉황산에 자리한 사찰로, 동굴법당과 병풍바위 아래 약사여래불, 지장전 등이 있는 곳입니다. 세계 최대 동굴법당으로 영국 기네스북에 등재되었습니다. 제게 이곳은 크기보다 깊이로 남는 절집이었습니다. 차가운 돌벽과 바위의 숨결이 어우러진 공간에서 바깥에서 들고 온 말들이 조금씩 내려앉았습니다.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물줄기도 좋았습니다. 물은 바위를 때리듯 흘러내렸지만, 소리는 거칠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오래 묵은 것을 씻어 내는 소리 같았습니다. 노란 꽃이 물가에 피어 있었고, 작은 석불은 그 옆에서 말없이 앉아 있었습니다. 의령 깊은 산속까지 찾아온 수고를 그 물소리가 대신 씻어 주는 듯했습니다.

연못에는 수련 잎이 둥글게 떠 있었습니다. 잎 사이로 작은 꽃이 피어 있었습니다. 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눈길을 오래 붙잡았습니다. 물 위에 조용히 얼굴을 내민 꽃을 보며, 사람 마음도 저렇게 잠시 떠 있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절을 다 둘러본 뒤 입구 쪽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셨습니다. 컵받침 종이에는 손글씨로 “안 생길 것 같죠? 생겨요. 좋은 일…”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별것 아닌 문장인데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깊은 절집을 돌아 나온 뒤 만난 말이라 더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좋은 일은 거창하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커피 한 잔 옆에서 슬며시 생기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붕사는 쉽게 갈 수 있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오래 남는 곳이었습니다. 조금 불편한 길을 지나야 만나는 절집, 그 불편함을 통과한 사람에게만 조용히 내어 주는 고요가 있었습니다. 거대한 바위는 묵직했고, 물소리는 맑았고, 법당 안의 촛불은 작았습니다. 그 셋이 함께 마음의 묵은 때를 벗겨 주었습니다. 바위 곁에 마음을 기대고, 커피 한 잔으로 다시 길을 나설 힘을 얻은 날이었습니다.
▣ 일붕사
- 위치: 경남 의령군 궁류면 청정로 1202-15
- 주차: 입구 전용 주차장 무료 이용 가능
- 관람 포인트: 동굴법당, 봉황산 암벽, 폭포, 사천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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