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이 만들어진 까닭 중 하나가 우리 고장 진주에 있습니다. 세종 10년인 1428년 10월 3일 진주 사람 김화(金禾)가 아비를 죽인 존속 살인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런 패륜을 막고자 세종은 효도에 관한 전기를 모아 삽화를 곁들인 <효행록(孝行錄)> 발간했습니다. 5년 뒤<삼강행실도>를 만들어 조선 팔도에 보냈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한문을 모르는 백성에게는 책은 그림의 떡이라 여겨 훈민정음을 만들어 1446년 9월 29일 반포했습니다. 1490년 성종 때 삼강행실도 언해본(한글판)이 나와 어리석은 남녀가 쉽게 깨달아 충신, 효자, 열녀가 무리에서 나오는 세상을 꿈꾼 세종의 바람이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자랑스러운 한글이 만들어진 계기가 된 진주에는 한글의 흔적이 또한 있습니다. 의곡사 입구에 문화재로 지정된 경남 유일의 한글 비석이 있습니다.
의곡사는 진주를 부드럽게 에워싼 비봉산(飛鳳山, 높이 138m) 자락에 안겨 있습니다. 진주고등학교 뒤편으로 향하자 좁다란 골목길 양쪽에 벽화들이 걸음을 더욱 가볍게 합니다.
의곡사 입구에 이르면 좁은 골목길에서 탁 트인 공간이 나옵니다. <비봉산 의곡사>라는 편액이 걸린 문이 나옵니다. 글씨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구한말 《한성순보》 기자를 지내고 독립운동가·서예가·언론인 등으로 활약한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선생이 썼습니다.
뒤편으로 주차장이 있습니다. 옆으로 차들이 다닐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계단을 올라 의곡사 경내로 발을 들이자 싱그러운 비봉산의 기운이 천천히 밀려옵니다.
종각과 일주문 역할을 하는 정면 3칸, 측면 2칸 대흥루(大興樓) 앞에는 여러 차가 세워져 있습니다. 산 쪽으로 주차된 사이로 비석 두 개가 보입니다.
조선 시대 비석에 한자가 한글로 새기는 사례는 드뭅니다. 당시에 건립된 한글 비석 중 현존하는 것은 전국에 5개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로 30cm, 세로 80cm, 두께 14cm인 비석 위쪽에는 한자 첫 글자 남(南)과 부(父)가 소실되었습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 한글 비석 가운데에는 새겨져 있고, 오른쪽에 ‘父母生天目連經(부모생천목연경)’이라고 한자로 새겨져 있고 왼쪽에는 ‘부묘생쳔목연경’이라고 한글로 새겨져 있습니다. 빗돌을 세운 시기는 ‘丙辰三月(병진삼월)’로 적혀 있습니다.
빗돌이 안내판에 따르면 빗돌에 새겨진 한글에는 ‘ㅇ’이 쓰이지 않아서 동아시아 국제전쟁(임진왜란) 이후에 빗돌을 세웠음을 추정합니다. ‘텬’을 ’천‘으로 쓴 것(구개음화)은 1700년대 전후이므로 ’병진‘은 18세기 중후반의 병진년으로 미루어 짐작하고 있다고 합니다.
비석을 세운 주체에 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비석을 세운 사람은 자신의 이름도 남길 수 없을 정도로 미천한 신분이었던 이로 여겨집니다. 미천한 사람이지만 부모님을 위해 극락을 기원하며 비석을 세운 듯합니다.
한글 비석을 지나 의곡사 경내를 돌아봤습니다. 의곡사는 665년(신라 문무왕 5) 혜통(惠通)조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집니다. 월명사, 숭의사 등으로 이름이 바뀌기도 했습니다.
의곡사라는 이름은 동아시아 국제전쟁(임진왜란) 때 이후입니다. 당시 절에서 승병을 양성해 진주성 1, 2차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의로운 골짜기에 있는 사찰’이라는 의미로 의곡사(義谷寺)라고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경내를 둘러보고 나오면서 다시금 한글 비석으로 향했습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손을 얹었습니다. 효심이 담긴 한글 비석. 세종이 꿈꾼 바람이 여기에 실현된 증거이기도 합니다. 효심이 돌 너머로 전해지는 기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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