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이야기

손 얹고 마음으로 느끼자 선사시대 사람들의 함성이 들린다- 사천 신벽동 고인돌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19. 1. 8.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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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문턱을 넘었다. 그렇지만 볕은 따뜻하고 바람은 달곰하다. 어디론가 떠나기 좋은 날. 황금 보기를 돌 같이 여긴 최영 장군과 달리 돌보기를 황금처럼 여긴 선사 시대 사람들의 흔적을 찾아 길을 나섰다.

 


사천 신벽동 고인돌

 

진주에서 국도 3호선을 타고 가다 사천 남양초등학교 쪽으로 빠지면 얕은 구릉 위에 여느 무덤과 다름없는 묘지가 나온다.

 


진주에서 국도 3호선을 타고 가다 사천 남양초등학교 쪽으로 빠지면 얕은 구릉 위에 여느 무덤과 다름없는 묘지가 나온다. 그곳에 고인돌이 있다.

 

와룡산 자락이 먼발치에서 감싸 안은 김해 김씨 묘소에서는 사천 바다가 또렷하게 보인다. 묘소를 에워싼 소나무들 위로 햇살이 곱게 드리운다.

 


사천 신벽동 지석묘는 김해 김씨 문중 묘소 내에 있다.

 

무덤 주위에는 5개의 돌이 있다. 지역 주민들이 칠성대(七星臺)라고 부르는 고인돌이다. ‘신벽동 지석묘(新碧洞支石墓)’. 김해 김씨 무덤 주위에 5기의 고인돌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늘어서 있다.

 


사천 신벽동 지석묘는 김해 김씨 문중 무덤 주위에는 있는데 지역 주민들이 칠성대(七星臺)라고 부르는 고인돌이다.

 

지석묘(支石墓)는 청동기 시대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 또는 돌멘(Dolmen)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 지석묘는 4개의 받침돌을 세워 석실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上石)을 올려놓은 탁자식(북방식)과 땅속에 석실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놓은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남방식)으로 구분한다.

 


사천 신벽동 지석묘는 땅속에 석실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놓은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남방식)이다.

 

이곳 고인돌은 바둑판식이다. 덮개돌의 크기는 길이 4m, 너비 3m, 높이 0.9m 정도인데 아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하부구조는 알 수 없다.

 


사천 신벽동 지석묘는 아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하부구조는 알 수 없다. 주변 밭과 과수원에서도 작은 고인돌이 10여 기 흩어져 있다고 한다.

 

여기 고인돌 중 하나에는 비석처럼 글을 새겨 넣기도 했다. 고인돌의 영험함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지 않았을까. 그래서 무덤을 쓰고 돌에 글자를 새긴 것은 아닐지 궁금하다.

 


사천 신벽동 지석묘 중 하나에는 비석처럼 글을 새겨 넣기도 했다.

 

주변 밭과 과수원에서도 작은 고인돌이 10여 기 흩어져 있다고 한다. 고인돌이라고 안내판이 서 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그저 평범한 돌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고인돌은 우리 땅 곳곳에 흔한 바위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물러나서 고인돌을 바라보자 마치 소나무 세 그루가 돌에서 솟구친 듯 형상으로 하늘을 향했다. 소나무를 지나는 바람 소리가 마음결을 휘감는다.

 


사천 신벽동 지석묘를 달리 바라보면 마치 소나무 세 그루가 돌에서 솟구친 듯 형상으로 하늘을 향한 모습을 연출한다.

 

고인돌에 내 그림자가 비친다. 괜스레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혔다. 너머로 와룡산이 와락 안긴다. 오랜 세월을 어루만져온 돌의 질감이 손으로 전해진다.

 


고인돌에 내 그림자가 비친다. 괜스레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혔다.

 

눈으로 보는 고인돌은 그저 지루하다. 손을 얹고 마음으로 느끼고 머리로 상상하면 거대한 돌을 자르고 옮긴 선사시대 사람들의 함성이 들린다.

 


사천 신벽동 지석묘에 해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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