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이야기

사천여행-벚꽃 너머에 있는 패전의 역사를 잊지 않고 미래로 나갈 길을 찾는 곳, 사천 선진리성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18. 2. 26.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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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지나칠 수 없다. 더구나 사천까지 왔다면 선진리성은 꼭 가봐야 한다. 흐드러지게 피는 벚꽃이 아니더라도 선진리성은 사천에 왔다면 가봐야 할 역사의 현장이다.



2월 21일, 사천 조명군총을 지나 성으로 향하다 멈췄다.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토성이 나온다. 시루떡 놓듯 흙을 다져 성을 쌓은 토성은 경남 서남부지역의 세곡을 수납해 해안을 경유 예성강 입구로 운반했던 조창이었던 통양창 자리다. 조선 태종 3년(1403년) 통양창에 왜구의 출몰이 잦자 조세운송은 해로에서 육로로 바뀌었다. 



토성을 지난 조금만 더 바닷가로 가면 선진리성 나온다. 큼지막한 선진리성 표지석 옆으로는 작은 비석이 세 개나 있다. 일제 강점기 때는 고적 81호였다가 해방 이후 사적 50호가 되었다가 왜성이라는 이유로 1998년 지방문화재 274호로 격하된 시대의 변천이 비석 하나하나에 새겨져 있다.



수령 200~400여 년 된 벚나무 1,000여 그루가 군락을 이뤄 봄철에는 수많은 상춘객이 몰려오는 관광지로 바뀌었다. 



벚나무는 가장 먼저 꽃을 피우고 가장 먼저 단풍 드는 나무다. 꽃도 단풍도 볼 수 없는 이곳은 우리 역사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낸다.



왜성은 조총이라는 무기의 체계에 맞춰 성(城)도 같이 발전을 이루었다. 성벽이 우리나라와 달리 누워 있는 형상이다. 성벽 위에는 도베이(흙담)이라고 하는 담장을 만들어서 뒤에 몸을 은폐한 채 사격을 가했다. 뱀이 똬리를 틀 듯 성벽을 여러 번 꺾어서 방어에 가장 유리한 성의 구조를 만들었다. 백 년간의 전투를 거치면서 적은 인원으로 많은 적을 대적할 수 있도록 축성기술도 발전한 것이다. 옆으로 일렬로 들어갈 수 없어 꼬리를 물고 들어가게 되어 있다. 직진이 안 되는 성문 앞에는 총포 구멍이 나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인 1918년 시마즈 가문의 후손들이 이곳을 매수해 공원으로 정비하고 일본 장수가 머무르는 천수각터에 시마즈 가문의 비석을 세웠다. 광복 이후 비석은 파괴되었다. 한국전쟁 중 순국한 공군 장병의 위령비인 충령비가 세워져 있다.



이충무공 사천해전승첩비가 1978년 세워졌다. 승첩비가 내려다 이는 바다가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처음으로 실전 배치해 싸워 이긴 곳이다. 




공원 내 화장실도 거북선 모양이다.



바라보이는 사천만 바다는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 느리게 흐른다. 여행자를 당시로 이끈다. 



선진리성 전투는 당시 왜군 처지에서는 본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퇴각로를 확보해야 하는 중요한 전투였다. 전투에서 이긴 왜군은 전남 순천에 있던 고니시가 이끄는 왜군과 힘을 합쳐 이순신·진린의 조명연합수군이 막고 있던 남해 관음포 앞바다로 500척이 넘는 대규모 함대를 몰고 나가 마지막 전투를 노량해전을 벌였다. 



오래된 벚나무에 골이 팼다. 그 속에 인근 대숲에서 날아온 씨앗이 자라 초록 잎을 활짝 열었다. 



패전의 역사를 잊지 않고 미래로 나갈 길을 찾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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