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이야기

뜬금없이 다가온 가야사, 뜸 들이며 살피다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17. 11. 15. 06:30
728x90


 

뜬금없다는 말로 지난 61일 가야사 연구를 국정기획자문위원회의 지역정책공약으로 채택할 것을 주문한 문재인 대통령 덕분에 가야사에 관한 관심이 높다. 덩달아 나 역시 117LH토지주택박물관 철의 왕국, 김해 금관가야를 찾아서답사를 재미있게 다녀왔다.

 


김해 분성산성에서 바라본 김해 시내 전경

 

가야인도 몰랐던 가야 이름

 

이영식 인제대 인문문화융합학부 역사고고 전공 교수는 답사에 앞선 지난 919일 토지주택박물관 인문학 강좌 가야사, 어떻게 볼 것인가에서 가야사, 똑바로 봐야 한다.”고 운을 떼면서 이야기를 먼저 시작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삼국시대가 아니라 각국 시대라 불러야 한다고 했다. 가야의 역사는 600년이지만 신라, 백제, 고구려에 묻혀 잊흰 존재로 있다고 했다. 삼국에 묻혀 부여도, 옥저도, 동예도 우리는 잊고 있었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가야라는 말은 산자락과 들에 모여 사는 마을을 뜻하는 가라(伽羅)에서 유래한 정치체를 뜻한다고 했다. 금관가야나 아나가야 등과 같이 현재 친숙한 가야 이름은 고려 시대 일연 스님이 고려 시대 행정구역명을 가야에 붙여지었던 이름에 불과하다고 했다. 정작 가야인들도 몰라던 나라 이름이다. 일본의 임나일본부설도 임나(任那)님의 나라(主國)’으로 가야의 여러 나라가 중심국이었던 김해의 가락국이나 고령의 대가야를 높여 부르던 말이라 했다.



김해 가야테마파크에서 분성산성으로 올라가는 가야 하늘길

 

한 바퀴만 돌아도 가야역사와 김해를 모두 이야기할 수 있는 분산성

 

진주에서 출발한 버스는 1시간여를 달려 김해 가야테마파크에서 멈췄다. 일행은 차에서 내려 길라잡이 이영식 교수를 따라 가야 하늘길이라 적힌 글을 따라 올랐다. 분산성 주위 걸어서 다녀올 곳을 안내하는 그림지도가 눈에 들어온다. 가야테마파크며 천문대, 수로왕비릉이 근처에 있다고 소개한다. 얼마 걷지 않아 갈림길이 나왔다. ‘황후의 노을 가는 길이라는 운치 있는 안내길을 따라 걸었다. 10여분도 채 걷지 않았는데 김해시 중심에 있는 분산(330m) 정상부를 둘러싸듯이 돌로 축조된 테뫼식 산성, 분산성이 나온다.

 


가야 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정하는 분산성은 고려 우왕 3(1377)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김해부사 박위가 옛 산성을 수리해 쌓았다. 조선 고종 8(1871) 김해부사 정현석이 다시 쌓아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가야 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정하는 분산성은 고려 우왕 3(1377)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김해부사 박위가 옛 산성을 수리해 쌓았다. 조선 고종 8(1871) 김해부사 정현석이 다시 쌓아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오늘날은 김해시 방면의 경사면에 900m 가량의 산성이 남아 있다. 산성 너머로 옅은 안개 낀 김해 시내가 들어온다.

 


김해 은해사 대왕전에는 수로왕과 허왕후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평범한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이다. 허황후의 진영(眞影)은 조선후기의 작품으로 이후에 수로왕 영정도 함께 모셔졌다고 한다.

 

김수로 왕릉을 중심으로 가야 유물 터가 보인다. 성곽에서 잠시 김해 시내를 내려다본 뒤 좁은 흙길을 걸으니 은해사가 나온다. 이 절은 허왕후가 배를 타고 가야에 온 뒤 풍랑을 막아 준 바다와 해신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지었다고 한다.

 

절에는 수로왕을 모시는 대왕전이 있다. 대왕전에는 수로왕과 허왕후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평범한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이다. 허황후의 진영(眞影)은 조선후기의 작품으로 이후에 수로왕 영정도 함께 모셔졌다고 한다. 허황후가 왔다는 망산도에서 가져 온 지름 15센티미터 정도의 봉돌이 쌀 그릇 위에 있다. 돌 위에 쌀을 올려놓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도 전해져 온다고 한다.

 

김해 드넓은 평야는 바다였다

 


김해 분성산에 있는 충의각은 흥선대원군 만세불망비를 비롯해 분산성을 쌓는 데 일조한 사람들의 업적을 기리는 4기의 비가 세워져 있다.

 

은해사를 지나자 흥선대원군 만세불망비를 비롯해 분산성을 쌓는 데 일조한 사람들의 업적을 기리는 4기의 비가 있는 충의각이 나온다. 충의각을 지나 발아래에 사각사각하는 낙엽을 밟으며 걸었다. ‘황후의 노을 가는 길만장대 가는 길이 한곳을 가리키는 곳으로 걸었다. ‘

 

수풀을 헤치며 가다 보면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라는' 만장대(萬丈臺)'가 적힌 바위가 나타난다. 흥선대원군이 왜적을 물리치는 전진기지로 '만길이나 되는 높은 곳'이라는 뜻의 칭호를 내렸기 때문이다.

 

좁다란 바위 사이를 지나 드문드문 성곽 너머 시내도 훔쳐보며 걸었다. 봉수대가 나왔다. 봉수대에서 바라보이는 김해 지역은 드넓은 평야가 아름답다. 예전에는 저곳이 바다였다고 한다. 현재의 남해고속도로가 해안선이라고 하는 말이 실감 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 이후 김해는 얕을 바다를 메워 땅을 넓혀 현재에 이른다. 봉수대 오른편 병풍처럼 서 있는 신어산을 비롯해 김해공항 활주로와 수로왕릉, 봉황동 유적지, 망산도, 김해공항 활주로가 한눈에 보인다.

 


김해 분성산 봉수대에서 바라본 김해 시내. 드넓은 평야가 아름답다. 예전에는 저곳이 바다였다고 한다. 현재의 남해고속도로가 해안선이라고 하는 말이 실감 나지 않는다.

 

쓰레기 더미 속에서 발견한 보물들을 찾아서

 

산성을 내려와 이동한 곳은 회현동에 있는 삼한 시대의 패총(조개무지)가 있는 봉황동 유적지다. 다락집을 지나 곧장 간 곳은 물 빠진 습지 앞이다. 습지에는 작은 나뭇배가 묶여 있고 왜가리 한가로이 옆을 거닐고 있다. 가야 시대까지 이곳까지 바닷물이 차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해 봉황대 유적공원

 

망루를 지나 걸어가다 경사진 언덕에 멈췄다. 흙 속에 무수히 많이 박혀 있는 조개껍떼기와 깨진 토기들. 가야시대의 쓰레기 더미 속에서 1000년 넘은 시간의 역사를 직접 눈으로, 손으로 느끼는 공간이다. 조개무지를 지나 주택가에 잔디가 곱게 깔린 언덕배기가 나왔다. 국사책에서 보았던 조개무지(패총)을 한 단면으로 잘라 전시한 곳을 관람했다. 기야인들은 쓰레기가 버렸지만, 후대 사람들은 쓰레기 더미에서 흔적을 찾는다.

 

구릉 위로 올라가자 다녀온 분산성이 보인다. 독무덤과 돌널무덤, 움집자리 등이 발견되어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가 겹친 삼한 시대의 유적지다. 회현동 조개무지를 지나 주택을 가로질러 금관가야왕궁 추정지로 향했다. 골목길에는 못다 이룬 사랑의 주인공 황세 장군과 여의 낭자의 설화를 바탕으로 한 벽화가 가는 걸음을 가볍게 한다.

 


김해 봉황대 유적지 내 경사진 언덕에는 무수히 많이 박혀 있는 조개껍떼기와 깨진 토기들. 가야시대의 쓰레기 더미 속에서 1000년 넘은 시간의 역사를 직접 눈으로, 손으로 느끼는 공간이다.

 

못다 이룬 사랑의 주인공 황세 장군과 여의 낭자, 골목길 벽화로 살아나

 

2~3m 깊이로 파놓은 땅 옆으로 집·우물 터 등이 있던 자리에는 흰색 선을 그어져 있는 왕궁추정지 발굴터가 나온다. 커다란 은행나무 아래 가락국시조 왕궁허지(駕洛國始祖王宮虛地)’라는 비석이 나오는데 조선 숙종6(1680)에 세운 비다.

 


김해 회현동 조개무지(패총)의 한 단면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서기 42315일 수로(首露)9간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고 국호를 대가락국(大駕洛國)으로, 수도는 김해로 정했다. 그는 임시로 궁궐을 세우게 하여 거처하면서 질박(質朴)하고 검소한 생활을 영위하니 집에 이은 이엉을 자르지 않았으며 흙으로 쌓은 제단은 겨우 3척이었다.’

 

가락국기에 의하면 수로왕은 가락국 초기 서기 423월부터 442월까지는 지금의 구지봉과 대성동고분군 사이로 추정되는 임시궁궐(假宮)에서 거처하였고, 442월에 새 궁궐(新宮)이 완성되자 이곳으로 옮겨 집정(執政)하였다고 한다. 이때의 새 궁궐 자리가 봉황동으로 추정되고 있다.

 


김해 가야왕궁 추정지

 

길라잡이 이영식 교수님에 따르면 가락국의 이름은 “‘가라의 나라가락국’”이라고 한다. 금관가야는 신라가 가락국을 통합한 뒤 생긴 이름으로 금관(金冠)은 가락국의 철()을 관리()하겠다는 정복자 신라의 의지가 담긴 이름이라고 한다. 김해의 가야국은 금관가야가 아니라 가락국이라고 한다.

 

김해의 가야국은 금관가야가 아니라 가락국

 

김수로 왕릉으로 향했다. 가야사 첫 장을 여는 주인공이면서 김해 김씨의 시조이기도 한 수로왕은 42년에 태어나 가락국을 세우고 199년에 158세의 나이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 교수는 임진왜란 때 끌려간 도공 심수관의 후손이 지금도 대를 이어 심수관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고 했다.

 


김해 김수로 왕릉

 

수로왕이 세상을 떠난 그 무렵에는 현재와 같은 커다란 봉토(封土,마운드)를 가진 고분이 발견된 적이 없다. 그럼 수로왕릉은 가짜? 이 교수는 왕릉은 개축되었다라고 한다. 신라 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의 누이동생 문희(문명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문무왕이 외가를 돌보기 한 것이라 한다. 현재 우리가 경주에서 본 것 같은 아주 큰 봉토의 고분으로 개축하고 정비했는데 당시 자장 좋은 전답을 왕위전(王位田)이라 하여 30정보나 부쳐, 왕릉 돌보는 경비로 충당하게 했다고 한다.

 


김해 김수로 왕릉 바로 앞에 있는 납릉정문(納陵正門) 좌우에는 흰색의 석탑 같은 것을 사이에 두고 두 마리의 흰색 물고기라 마주 보고 있다. 신령스러운 물고리라 해서 신어상이라 불리는 데 왕릉으로 오기 전에 본 태조왕릉 중수기적비 등에도 태양문이라 부르는 바람개비나 해처럼 보이는 무늬가 새겨져 있다.

 

왕릉 바로 앞에 있는 납릉정문(納陵正門) 좌우에는 흰색의 석탑 같은 것을 사이에 두고 두 마리의 흰색 물고기라 마주 보고 있다. 신령스러운 물고리라 해서 신어상이라 불리는 데 왕릉으로 오기 전에 본 태조왕릉 중수기적비 등에도 태양문이라 부르는 바람개비나 해처럼 보이는 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를 허 황후가 인도 아유타국에서 왔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주장은 맞지 않다고 한다. 허황후가 가져왔다는 수많은 보물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해 수릉원에 세워진 허황후상과 장군차밭

 

왕릉을 나와 김해공설운동장이었던 수릉원으로 향했다. 허황후상이 단풍 사이에 보인다. 뒤편으로 장군차가 있다. 양옆으로 난 구릉지가 옛 무덤터라고 한다. 대성동 고분군으로 걸음을 옮겼는데 길이 약 300m, 높이 20m 정도의 경사가 완만한 구릉지대로 무덤들이 밀집 된 곳이다. 대성동 유적지는 가야의 건국 설화가 깃든 구지봉과 회현동 패총 한가운데에 위치해 애꼬지(애기 구지봉)’이라 불렸다고 한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

 

가야사 뜨거운 감자- 할아버지 무덤을 손자가 파괴?

 

대성동 고분군에서는 북방계 유물과 같은 청동솥과 함께 덩이쇠 등이 발견되었다. 3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29호분을 4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39호분이 29호분을 파괴하며 들어선 중복(重複)이라는 현상이 특이하다. 자식이 죽은 뒤에 어버이의 품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서 선대의 무덤 한 부분을 깨고 후손의 무덤을 만들었다는 하나의 가족, 친족집단의 표시지 않을까 추정했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는 3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29호분을 4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39호분이 29호분을 파괴하며 들어선 중복(重複)이라는 현상이 특이하다.

 

대성동 고분군 전시실을 나와 가야전문 박물관인 김해박물관으로 향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머리를 돌로 눌렀다는 가야인들의 성형수술인 편두(偏頭)와 대한해협을 건넌 가야 부뚜막 귀신이 일본에서는 신으로 대접받는 신비로운 이야기를 엿보았다.

 


가야 전문 김해박물관에 전시된 금관

 

박물관 뒤편으로 난 가파른 길을 올랐다. 구지봉이다. 9()이 춤을 추며 불렀다는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놓아라. 만약에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구지가를 읊조리며 수로왕 건국 신화를 묵묵히 지켜보았던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을 보았다.

 


김해 구지봉에 있는 고인돌

 

구지봉에서 허황후릉으로 가는 길은 구름다리로 이어져 있다. 소슬한 가을바람이 불어와 머릿속을 맑게 깨운다. 일제강점기 거북이 목에 해당하는 자리에 부산과 마산 사이의 국도를 개설하면서 잘라 놓았던 지맥을 이어 붙인 것이라고 한다.

 


김해 구지봉에서 허황후릉으로 가는 구름다리

 

고대 건국신화, 통합 주체는 신랑으로, 대상은 신부로 표현

 

허황후릉에는 가락국수로왕비(駕洛國首露王妃) 보주태후허씨릉(普州太后許氏陵이라는 비석이 서 있다. 이 교수는 허황후릉과 김수로왕릉이 떠어져 있는 이유에 관해 원래 독자적인 출신과 조상에 대한 제사를 가지고 있던 왕비족으로 수로왕의 왕족과 일단 구별되는 정치집단의 성격을 띤다라고 했다. 건국 신화에 공통으로 나오는 혼인 이야기는 성격이 다른 두 집단의 통합이 가락국 성립이라는 역사로 나오면서 통합의 주체는 신랑으로, 통합의 대상은 신부로 표현되었던 것이 고대 건국 신화였다고 한다.

 


김해 허황후릉

 

왕릉 앞에 있는 파사석탑은 허왕후가 가락국에 시집올 때 거친 바람과 파도를 가라앉히기 위해 배에 싣고 왔다고 한다. 문헌 등의 자료에 따르는 한 허황후의 도래(到來)와 직접 연결하기는 어렵고 남쪽 바닷길을 거쳐 가야 지역에 선진문물의 한 갈래에 대한 전설로 해석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김해 허황후릉 앞에 있는 파사석탑

 

해가 뉘 엿 넘어갈 무렵 우리는 출발지로 돌아왔다. 가야사의 중심, 김해 깊숙이 들여다보고 느리게 움직이며 배웠다. 가야, 잊힌 역사가 살아와 내게 말 건넨 날이다.

 

자료 도움 : <이야기로 떠나는 가야역사기행(지식산업사)>,<철의 왕국, 김해 금관가야를 찾아서(토지주택박물관)>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