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이야기

하동여행, 그 남편에 그 부인, 의리와 절개를 다 한 발자취를 찾아 -하동 오천정씨정려각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17. 4. 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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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걸어야 볼 수 있다. 눈에 띄지 않는 작은 풀꽃들은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묵묵히 산다. 풀꽃처럼 작아서 허리 숙이며 살피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역사 가슴으로 배우는 곳으로 떠났다.

 

포은 정몽주 선생의 위패를 모신 하동 옥종 옥산서원으로 가기 전에 오천정씨 정려각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좁다란 농로를 따라 0.8km 정도 들어가면 최근 단장한 비각이 나온다.

 

남명 조식 선생이 쓴 지족당 조지서 묘비에 따르면 후취 부인 정씨는 생원 윤관의 딸인데, 윤관은 바로 문충공 정몽주의 증손이다. 갑자사화 때 부인이 적몰되어 성단(성 쌓는 부역)이 되었다가 초야에 떠돌았다. 아들 침은 포대기에 있었고, 리는 배속에 있었는데, 손수 나무 열매를 주워 오지사발에 삶아서 아침저녁으로 제전(祭奠)을 받들었다. 중종조에 정려문을 세워 포상하였다.’고 적혀 있다.

 

숙부인 정 씨는 고려말 충신 정몽주의 손자의 손자(현손)이다. 남편인 지족당 조지서 선생은 연산군의 스승이었다. 그러나 저 스스로 높은 체하고 임금을 업신여긴 자라며 갑자사화 때 죽임을 당했다.

 

일설에는 시신을 통째로 한강에 던졌다고도 하고 시신을 맷돌에 갈아 한강에 뿌렸다고도 한다. 이 참담한 소식을 들은 부인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남편의 시신을 찾아 헤맸을 것이다. 부인은 자신의 치마를 한강에 던져 치마를 한강에 던져 남편의 뼛가루와 피가 묻어 있는 혼백을 고이 안고 모시고 와서 만든 묘가 현재의 조지서묘다.

 

얼마나 원통했으면 갑자사화로 한순간에 노비 신분으로 전락해 성 쌓은 부역에 동원되었으면서도 젖먹이를 안고 배 속에 아이를 품고 남편의 신주를 등에 업고 다니며 아침저녁으로 삼년상을 치렀겠는가.

 

퇴계 이황 선생의 숙부인 진주 목사 이우가 이 사실을 조정에 알려 조선 중종 때 충신, 효자, 열녀들을 표창하기 위하여 그 집 앞에 세우던 붉은 문인 정문(旌門)을 하사받았다. 중종 2(1507) 옥종면 정수리 옥산서원 근처 정수역 앞에 처음 세워졌다가 조지서 선생의 후손이 낡은 것을 고치고 17609대손 조덕상이 조지서 선생 묘와 가까운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정려각은 정면 1,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 형태로의 한식 기와 목조 건축물이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 따르면 정려각 내에는 1734(영조 10)에 제작된 판액과 정려중건기, 1760(영조 36)동곡정려중건기, 1845년의 정려중수기등이 목판으로 제작되어 보관되고 있었다. 판액에는 열녀 중훈대부 행홍문관응교 세자시강원보덕 증통정대부 승정원도승지 조지서 처 숙부인 오천정씨지려. 1507(중종 2) 정묘년에 정려 내릴 것을 명하였고, 1515(중종 10) 갑인년에 중건하였다[烈女中訓大夫行弘文館應敎世子侍講院輔德贈通政大夫承政院道承旨趙之瑞妻淑夫人烏川鄭氏之閭 中宗二秊丁卯命施閭當宁十秊甲寅重建]”라고 쓰여 있다.’고 하는데 현재는 문중에서 따로 보관하는 모양인지 비각 안은 비어 있다.

 

현재의 정려각은 기둥과 도리, 포부재 등이 부식이 심해 2010년에도 전면 해체하여 보수했다.

 

정려각에서 북쪽 300m 이내에 오천 정씨의 묘소와 남편 조지서, 시부의 묘소가 있다.

 

정려각에서는 숙부인 정 씨의 묘가 바라보인다. 남명 조식 선생은 <유두류록>에서 부인을 일러 절개와 의리를 둘 다 이룬 경우가 여기에 있다 하겠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잊지 말아야 할 역사를 가슴으로 배웠다. 오천 정 씨 정려각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분명하게 일깨워준다. 불의에 굴하지 않고 정도를 걸어왔던 부인의 마음이 봄바람에 실려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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