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이 병풍처럼 남강을 에워싸는 봉우리가 일곱 개라는 칠봉산
5월 나흘 연휴 동안 열심히 일한 나를 위해 가볍게 길을 나섰다. 벼랑이 병풍처럼 남강을 에워싸는 봉우리가 일곱 개라는 칠봉산을 5월 9일 찾았다. 산을 본 적은 무수히 많다. 정작 칠봉산에 오른 것은 이날이 처음이다. 경남 진주 시내에서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를 다닌 이들이라면 누구나 소풍 장소로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굴바구’, ‘굴바위’라고도 부른 산 아래 모래밭에서 놀았지만, 산에 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에게는 큰 바위의 산이었다.
진주 칠봉산
진주시 하대동 집을 나서 평거동 희망교를 지나 내동면 독산리 휴먼빌 아파트 정문 앞을 지나 산 쪽으로 차를 세웠다. 현 위치에서 전망대까지 1.24km, 전망대에서 무지개동산까지 2.3km인데 각기 30분, 50분이면 거닐 수 있다고 들머리 안내판에 적혀 있다. 올라가는 초입의 나무계단 사이로 애기똥풀이 나를 보며 씨익 노랗게 웃는다. 1분도 지나지 않아 나무계단이 끝나자 숲은 더욱 짙은 초록빛이다. 완만한 능선이 시작이다. 흙길이다. 푹신푹신한 흙이 신발 너머로 마음을 평안하게 해준다. 흙길 옆으로 ‘소나무재선충병 예방 나무 주사’를 놓은 곳이라는 걸림막이 걸려있다. 솔잎채취를 2017년 12월까지 금지한다는 안내였다. 나무도 예방주사를 맞듯 사람도 산을 찾아 마음의 예방 주사를 맞는지 모르겠다.
가볍게 거닐 수 있는 칠봉산은 완만하다.
초록빛 숲 속에서도 하늘에서 비행 훈련하는 공군 훈련기 소리가 들린다. 근처 대전-통영고속도로를 비롯해 도로의 차들이 바람을 가르며 내지는 소리도 함께 들린다. 갈림길이 나왔다. 2명 이상 거닐 수 있는 길을 피해 거칠지만 혼자 오붓하게 거닐 수 있는 오솔길로 걸었다. 그래 봤자 1~2분 이내 다시 만난다.
땀을 훔치는 틈틈이 양말이 느슨해져 자꾸 벗겨지려 한다. 양말을 바로 신으려 근처 긴 의자에 앉았다. 여름 바지와 셔츠는 시원한데 양말이 속을 썩인다. 그런 나를 분홍빛 땅비싸리꽃이 위로해준다. 걷는 오른편은 남강을 함께하는 진주 시가지겠지만, 나무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 물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국수나무가 시원하게 하얀 꽃을 피웠다. 빙수 같다. 가방에서 보온병을 꺼내 냉커피 한 모금 마셨다. 쓰면서도 달건 한 냉커피가 개운하게 목을 타고 넘어간다. 길은 완만하다. 경사를 느낄 수 없을 정도다. 땀 한번 훔치며 걸어온 길 돌아본다. 미련일까.
칠봉산 곳곳에 쉴 수 있는 긴 의자들이 놓여 있다.
곳곳에 긴 의자가 놓여 있어 기다리는 사람도, 바삐 걸음을 옮겨야 할 까닭이 없는 나를 쉬어가라 붙든다. 의자에 앉아 물 한 모금 마시자 문득 숲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 남강이, 진주 시가지가 보고 싶었다. 숲은 쉽사리 내게 풍광을 보여주지 않았다. 오히려 찔레가 하얀 꽃을 드러내며 웃는다. 어디선가 단내가 났다. 아까시나무들이 꽃을 피웠다. 코를 벌려 한껏 들이마셨다. 아카시 꽃내음이 달면서 향긋한 유혹에 그만 꽃을 꺾었다. 벌이 꽃을 찾듯 나는 손은 꽃으로 가져갔다. 꽃내음이 입안에서 퍼진다.
아까시나무는 나무를 베어내 헐벗고 척박한 우리 땅을 비옥하게 만들고 푸르게 만든 일등 공신이다.
주로 열대 건조한 지역에서 사는 아카시아(Acacia)로 잘못 부르는 아까시나무를 나는 한때 편견으로 바라봤다. 왕성한 성장력으로 산에 다른 나무를 못살게 굴고 산을 망친다며 이 나무를 베어내야 할 몹쓸 나무로만 여겼다. 아까시나무는 나무를 베어내 헐벗고 척박한 우리 땅을 비옥하게 만들고 푸르게 만든 일등 공신이다.
아까시나무 꽃향기에 취해 걷는 숲길은 즐겁다. 약수암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왔지만 내려가지 않고 그냥 걸었다. 벌이 꿀을 찾듯 코는 향긋한 아까시나무 꽃향기를 찾고 걸음을 가볍게 한다.
칠봉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진양호.
아까시나무 사이를 지나 국수나무를 지나자 설핏 나무 사이로 진주 신안평거 지역이 보인다. 숲에서 바라보는 신안평거 지역은 아파트 숲이다. 쉬엄쉬엄 걸었기 때문일까 전망대에 이르기까지 1시간 정도 걸렸다. 전망대에서는 진양호를 품은 풍경을 드러내 보인다. 숲 속에서도 걸려온 전화로 업무를 보는 목소리가 다급하다. 전망대에서 숨 고르며 경치를 구경하는 사이로 산에서 만난 젊은 할머니와 아주머니의 대화가 들린다. “자식들에게 폐 안 끼치려고 건강하게 살다 죽으려고 산에 오지”,“그럼요~” 100세 시대 사는 우리의 자화상인듯 씁쓰레하다.
칠봉산에서 바라보는 남강 풍경은 아름다움 그 자체다.
전망대에서 땀을 훔치고 사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걸음을 재촉했다. 전망대에서 무지개동산으로 가는 길은 내려가는 길이다.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발아래 골무꽃이 보랏빛 꽃을 피웠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만나는 꽃들이며 나무들이 반갑다. 오솔길이 좋다.
봉우리 일곱 개가 있다는 칠봉산은 완만한 까닭에 봉우리라는 느낌조차 없다.
숲을 지나 하늘이 드러나는 길을 잠시 걸었다. 몇 개의 봉우리를 넘었는지 모른다. 완만한 까닭에 봉우리라는 느낌조차 없다. 겸손하게 살라고 일러주는 듯 길을 가로질러 나무가 있다. 오르고 내리고. 숲 사이사이 강이 보이고 집들이 보인다. 진주댐이 가까이 보일 무렵 가벼운 옷차림의 할머니 3명과 할아버지 2명이 걸어간다. 약수암에서 2km가량에 이르자 쉼터가 나온다. 전망대보다 저 멋진 전망이다.
진주 칠봉산 산책로.
어릴 적 소풍 장소였던 곳은 습지원으로 바뀌었다. 바뀌지 않은 것은 칠봉산 벼랑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광 너머에는 바람처럼 옛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돌미륵이 있던 독산리에 힘센 장사가 많이 태어난다고 전해지자 강 건너 평거 사람들이 밤에 몰래 돌미륵을 부수자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그 뒤로는 장사가 태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비록 전설이지만 왜 돌미륵을 부수고 장사가 나오지 못하게 했을까.
풍광에 취해 걸음은 쉬 옮기지 못했다. 남강처럼 진주 촉석루를 휘감아 돌아 낙동강을 만나고 부산을 거쳐 태평양으로 이어지는 쉼 없는 여정을 따라가고 싶다.
진양호
고압 전류가 흐른다는 철탑 아래에 이르자 진주댐이 아주 가까이 보인다. 철조망 사이로 사람들이 드나든 곳에 이르자 진양호가 한눈에 들어온다. 맑고 푸른 호수에 묵은 마음은 깨끗해진다. 다시 걸음을 재촉하자 푸른 호수보다 더 푸른 초록 잎사귀들이 눈을 개운하게 한다. 어느새 무지개동산 앞 시내버스 정류장에 이르렀다. 길 건너 진양호를 다시 눈에 담았다.
칠봉산은 가벼운 산행길로 그만이다.
칠봉산은 가벼운 산행길로 그만이다. 넉넉하고 여유롭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숲 속에서 부드러운 흙길을 걷다 보면 온몸이 다 맑아진다.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누리는 평안함이 남강과 함께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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