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산청 성심원 어르신들과 직원들이 경호강의 돌을 주워 만든 ‘희망의 돌탑’ 3개가 요양원 입구에 서 있다.
바람 피우기 좋은 날이다. 오전에 비 온 뒤라 바람은 더없이 시원했다. 작은 먼지 한 톨마저 다 비에 씻겨간 날이다. 하늘은 드문드문 구름 사이로 짙푸른 빛깔을 드러낸다. 27일, 경남 산청 성심원을 찾았다. 성심원은 한센인들이 세상의 편견을 피해 정든 고향과 가족을 떠나 1959년 이곳에 터전을 마련해 지금에 이르는 마을이자 생활복지시설이다. 먼지 하나에도 우주가 깃들었다는 ‘우주 산책’을 다녀왔다. 이곳에는 어느 곳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뜻으로 우주를 품은 예술프로그램 ‘지리산프로젝트’가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11월 1일까지 열리고 있다.
맑은 호수를 닮았다는 경호강을 건너자 지리산둘레길이 지나는 산청 성심원을 지나는 지리산 둘레길은 가을을 담은 색으로 변했다.
맑은 호수를 닮았다는 경호강을 건너자 덩쿨장미가 여름의 흔적을 어렴풋이 기억하려는 듯 드문드문 아직 여름을 붙잡고 있다. 덩쿨장미 너머로 늘 푸른 반송 한 그루가 작은 로터리 광장에 우뚝 서 있다. 오른편에는 아직은 노란 물결로 염색하지 않은 은행나무 아래로는 ‘희망의 돌탑’ 3개가 서 있다. 성심원 마을 어르신들과 직원이 경호강의 돌을 함께 날라 탑을 세웠다. 오는 10월 30일부터 11월 1일까지 성심원 곳곳에서 열리는 제4회 성심인애대축제 때 제막을 앞두고 있다. 하나하나 쌓아올린 돌에는 한센병으로 인한 세상의 편견과 고통의 아픔을 치유하는 희망이 묻어있다.
산청 성심원 요양원 은행나무 앞에는 지난해부터 세월호 참사를 잊지 말자는 취지로 천일기도가 시작되었다.
은행나무 아래에는 노란 리본들이 바람에 흔들거린다. 지난해부터 세월호 참사를 잊지 말자는 취지로 천일기도가 시작되었다. 참가자들의 의지가 리본에 묶여 바람에 펄럭이다. 나무 옆에는 세월호 희생자 유민 아버지가 단식투쟁을 하며 진실규명을 외쳤던 장면을 다룬 ‘아버지의 눈물’이 놓여 있다. 파란색 직사각형에는 진실규명을 외치며 세상을 향해 엎드려 우는 아버지의 모습이 담겨있다.
세월호 희생자 유민 아버지가 단식투쟁을 하며 진실규명을 외쳤던 장면을 다룬 ‘아버지의 눈물’
은행나무 동산을 나와 다시 반송이 있던 로터리 쪽으로 향했다. 도토리나무에 쇠 나룻배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저만치 노인전문주택 가정사 2동 앞, 강당 벽면에도 나룻배가 그려져 있다. 한때는 세상의 편견을 피해 육지 속의 섬이었던 성심원을 세상과 연결해주던 배였다. 배를 지나자 강당이 나온다. ‘2015 우주 산책’이라는 지리산권 지역 예술인들이 만든 지리산프로젝트의 하나로 예술창작물이 전시되고 있다. ‘도큐먼트+기획전 <희망의 원리>라는 펼침막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산청 성심원 강당 한쪽 벽면 가득 돋을 글씨가 LED 조명에 존재를 드러내는 ‘마음’.
성심원에서 난 폐지와 등을 이용해 십장생도를 만든 ‘우주공’이 눈에 들어온다. 오른편 벽면 가득 돋을 글씨가 LED 조명에 존재를 드러낸다. ‘마음’ 이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마음’ 이라는 글자는 또렷하게 읽을 수 있지만, 정면을 벗어나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몸을 움직이면 글자가 아니라 직사각과 네모들의 형상만 보인다.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다.
성심원 한센인들의 구술자료 중 ‘나는’과 ‘내가’라는 등 자신이 들어가는 문장만 따로 편집하여 빔으로 쏜 설치 작 ‘첫 번째 사람’이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형태의 ‘민화’가 우주공 뒤편에 색색이 들어서 있다. 해맑게 웃는 호랑이 덕분에 나도 덩달아 웃었다. 커튼이 쳐진 무대 뒤편에는 차가운 빛이 무대 벽면을 가득 채웠다. 하얀 벽돌에 묻어난 이 빛의 존재는 찬찬히 살펴보자 글자다. 여기 성심원 한센인들의 구술자료 중 ‘나는’과 ‘내가’라는 등 자신이 들어가는 문장만 따로 편집하여 빔으로 쏜 설치 작이다. 한센인이라는 나 자신을 숱하게 인식하며 살아왔던 이들의 강제된 의식의 발로인 셈이다. 마치 예루살렘 ‘통곡의 벽’처럼 경건하게 엄숙하다.
‘카드결제일’ 작품은 잔인한 분홍빛이다.
‘첫 번째 사람’이라는 정용국의 설치 작 뒤로는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는 카운트 다운이 벽에 비쳐 있다. 2층으로 올라가는 좁다란 계단 밑은 분홍빛이 퍼져 나온다. 네온사인으로 ‘카드결제일’이 적혀 있다. 월급 받은 날 지난달 사용한 카드빚이 빛의 속도로 사라지는 경험을 하는 내게 카드 결제일은 결코 분홍빛이 아니다. 잔인하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계단을 올라갔다. 오른쪽, 왼쪽, 위아래가 하얀 공간이 나온다. 그 가운데에 덩그러니 나무 책상이 있다. 이건 또 뭘까? 고민하는 사이 목이 마른다. 가방에서 캔커피를 꺼내 마시려고 강당을 나왔다. 푸른 잔디 운동장 한쪽에 있는 긴 의자에 앉았다. 산에 걸린 구름 한번, 커피 한 모금. 바람 한 점에 커피 한 모금. 홀짝홀짝 마신 커피가 끝을 드러내자 미련없이 의자에서 일어나 대성당 쪽으로 걸었다.
큰 키의 사람은 싱겁다고 하던데 멀대처럼 기다란 ‘가우라’ 이 녀석은 고운 햇볕은 담은 분홍 꽃을 앙증스럽게 피웠다.
대성당으로 가는 길에는 빨간 대추 열매가 햇살에 익어가고 있었다. 화단에는 예쁜 꽃 하나 피었다. 큰 키의 사람은 싱겁다고 하던데 멀대처럼 기다란 ‘가우라’ 이 녀석은 고운 햇볕은 담은 분홍 꽃을 앙증스럽게 피웠다. 깊어가는 가을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는 꽃의 인사를 받으며 대성당 밑 유의배공원으로 갔다. 이곳 어르신들의 시화전이 열린다. ‘바람이 전하는 말’이라는 시 제목처럼 바람이 싱그럽게 느껴지는 날이다. 시와 그림을 하나하나 구경하며 가을을 내 마음속에 물들였다.
대성당 앞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입구 잔디밭에는 고양이와 비둘기 떼가 주인인 양 햇살에 샤워하거나 먹이를 쪼아먹고 있는 작품은 그저 평화롭다.
대성당 앞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입구 잔디밭에는 고양이와 비둘기 떼가 주인인 양 햇살에 샤워하거나 먹이를 쪼아먹고 있다. 내가 이들 가운데로 가도 이 녀석들은 놀라거나 도망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흐트러짐 없이 하던 동작 그대로다. 물론 이 녀석들은 살아있는 생물이 아니다. 조형물이다. 기다란 의자에 앉아 있는 고양이와 그 아래에서 무심한 듯 두 발 모으고 앉은 녀석까지 모두가 그저 평화롭다.
모기가 팔에 앉아 작가의 피를 빨고 있는 장면에서 연상된 ‘교환, 서로 다른 익숙한’
고양이 무리를 지나 위로 올라가면 모기가 팔에 앉아 작가의 피를 빨고 있는 장면에서 연상된 ‘교환, 서로 다른 익숙한’이라는 구헌주의 벽화가 나온다. 안내문을 읽기 전까지 나는 시원하고 단 포도즙인 줄 알았다.
‘바람이 불어오는 마을’ 성심원에서 매번 걷는 같은 길인데도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 풍경에 걸음 멈추고 바람을 맞았다.
바람맞기 좋은 날, ‘바람이 불어오는 마을’ 성심원에서 매번 걷는 같은 길인데도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 풍경에 걸음 멈추고 바람을 맞았다. 짧아서 더욱 아쉬운 가을, 어디론가 떠나야 할 것 같다면 바람이 불어오는 마을에서 바람을 맞는 것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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