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이야기

일제 감시 피해 짚신으로 꼬아 파리로 보낸 독립염원-500년 세월의 경남 산청 남사예담촌에 있는 유림독립기념관에 가다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15. 3. 14.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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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의 세월을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나는 거슬러 올라갔다. 11, 지리산 천왕봉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1인 경남 산청군 단성면 남사예담촌을 찾았다. 남사예담촌은 5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동네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이 마을을 에두르고 야트막한 산을 뒤에 두고 500년 전 선비의 지조를 지키는 동네다. 경북 안동 하회마을만큼이나 아름다운 마을은 등록문화재 281호로 지정된 돌담으로 이루어진 골목길에는 이씨고가, 최씨고가, 사양정사 등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1인 경남 산청군 단성면 남사예담촌. 남사예담촌은 5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동네다.

 

남사예담촌은 마을 왼편으로는 공자의 고향의 산 이름에서 따온 니구산(尼丘山)’이 있고 남사천이라는 개천이 휘감아 돌아 나가는 반달 모양이다. 보름달이 되어 다시 기울지 않기 위해서 마을 한가운데를 빈터로 비워두고 있다. 오늘 내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와 세운 주차장이 그 빈터다. 반달모양의 모래벌판의 마을이라는 이름의 사월(沙月)이라 불렸다고 한다. 강의 남쪽에 위치해 남사월이라 불리다가 남사(南沙)라는 이름이 붙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시간이 멈춘 듯한 고즈넉한 남사예담촌의 풍경에 더해 봄 햇살이 좋은 이 날 돌담길에서 길을 잃었다. 그래도 기분이 좋다.

 

시간이 멈춘 듯한 고즈넉한 풍경에 더해 봄 햇살이 좋은 이 날 돌담길에서 길을 잃었다. 여기인 듯 들어가면 막다른 곳이고 여느 집 대문이 나왔다. 그런데도 기분이 좋았다. 누구와 시간을 정해놓고 찾아간 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미로 같은 골목길을 빠져나와 남사천 개천 건너자 한옥 건물 두 채가 눈에 들어왔다. 하나는 이동서당(尼東書堂)이고 또 하는 2013년에 문을 연 유림(儒林)독립기념관이다.

산청군 남사예담촌 남사천 건너에 있는 이동서당(왼쪽)과 유림독립기념관.

 

이동서당을 지나 유림독립기념관으로 들어갔다. 기념관 내부 왼편에 태극기를 휘날리며라는 제목 아래 우리의 국기, 태극기 설명이 나온다. 태극기는 대자연의 진리를 담았다고 한다. 흰색 바탕은 밝음과 순수, 그리고 전통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 민족성을 나타낸다. 태극문양은 음(파랑)과 양(빨강)의 조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우주 만물이 음양의 조화로 인해 생명을 얻고 발전한다는 대자연의 진리를 표현한 것이다. ‘, , , 는 각각 하늘과 땅과 물과 불을 상징한단다.

산청군 남사예담촌에 있는 유림독립기념관.

 

영상실이 있지만, 그냥 돌아서 기념관 정면에는 파리장서가 동판과 한글번역본으로 걸려 있었다. ‘파리장서1919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평화회의에 면우 곽종석 선생 등 유림대표 137명이 서명하여 대한민국의 독립을 호소한 2,674자의 독립청원서다. “한국 유림대표 곽종석 등은 파리평화회의에 관계하신 여러 훌륭하신 분들에게 삼가 글을 받들어 올립니다.”로 시작하는 파리평화회의에 보내는 편지를 찬찬히 읽었다. “종석 등은 차라리 목을 함께 모아 죽음으로 나아갈지언정 맹세코 일본의 노예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굳은 의지를 드러내며 끝맺고 있다.

 1919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평화회의에 면우 곽종석 선생 등 유림대표 137명이 서명하여 대한민국의 독립을 호소한 2,674자의 독립청원서인 파리장서가 동판과 한글번역본으로 소개되어 있다.

 

오른편으로 전시관 내부를 들어가면 나라가 망했는데 선비로서 이 세상을 사는 것은 큰 치욕이라는 유림, 세상에 고하다라는 큰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물결처럼 일렁이는 유림의 독립운동에 관한 안내 글과 사진 자료가 마음 깊은 곳에서 안으로 이끈다. 책을 덮고 일제에 저항해 의병을 일으키거나 망명길에 올라 독립운동에 투신한 500년 조선의 역사를 이끌어온 유림의 굳센 지조를 살펴볼 수 있다.

물결처럼 일렁이는 유림의 독립운동에 관한 안내 글과 사진 자료가 마음 깊은 곳에서 안으로 이끈다.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의 역사를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길 때마다 쉽게 그러나 엄숙하게 다가섰다. 3·1혁명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 모형에서 걸음을 멈추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맞은편에는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파리장서를 짚신으로 꼬았다고 하는 제작하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유림독립기념관 전시실 내부 전시

 

선비의 고장, 산청이 독립의 불길을 솟구친 사상의 배경으로 남명 조식(1501~1572) 선생을 돌아보는 코너가 있다. 평생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칼을 품고 방울을 달아 자신을 경계하며 실천하는 유학자였던 남명선생.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동북아국제전쟁(임진왜란) 때 홍의장군 곽재우를 비롯해 가장 많은 의병장을 배출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면우 곽종석 선생 초상화.

 

남명선생의 가르침은 면우 곽종석 선생에게도 이어져 파리장서 운동의 시작이 되었다. 전국 유림의 뜻을 하나로 모아 독립운동의 힘으로 결집한 곽종석 선생은 여기 기념관이 있는 남사예담촌이 출생지다. 곽종석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폐기와 조약 체결에 참여한 매국노를 처형하라고 상소했다. 1919년에는 삼천리 방방곡곡에 3·1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전국 유림의 궐기를 호소했다. 제자 심산 김창숙(金昌淑, 18791962) 등과 힘을 모아 프랑스 파리에 독립호소문인 파리장서를 보냈다. 선생은 그 일로 투옥되어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좁은 공간에 사람을 감금하여 앉을 수 없고 움직일 수 없도록 고통을 주었던 고문을 체험해보는 벽관 고문체험’.

 

좁은 공간에 사람을 감금하여 앉을 수 없고 움직일 수 없도록 고통을 주었던 고문을 체험해보는 벽관 고문체험’. 좁은 벽관에 몸을 넣기도 불편하지만 움직일 수 없는 고통을 직접 겪어보면서 치를 떨었다.

독립을 위해 헌신한 유림 159명의 적힌 이름판

 

독립을 위해 헌신한 유림 159명의 적힌 이름판 앞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159명의 독립투사 이름을 불렀다. 잊지 않겠다는, 그분들의 숭고한 정신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었다.

이동서당은 유림과 제자들이 남사 마을 사람들과 함께 일제의 서슬 퍼런 총칼에도 굴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한 곽종석 선생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서당이다.

    

유림독립기념관을 나와 바로 담장을 사이에 두고 있는 이동서당(尼東書堂)에 들렀다. 일직문(一直門)이란 현판을 내건 대문을 지나 서당 안으로 들어섰다. 이동서당은 유림과 제자들이 남사 마을 사람들과 함께 일제의 서슬 퍼런 총칼에도 굴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한 곽종석 선생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서당이다. 마을사람들의 씩씩하고 꺾이지 않는 마음가짐에 절로 고개를 숙였다.

 

남사예담촌 빛바랜 기와 위로 햇살이 부서졌다. 바람이 돌담길을 따라 지나고 그 자리에 봄이 새록새록 하다. 다시 걸어가는 길은 독립투사들께 아주 잠시라도 감사하고 고마움을 표하고 싶은 시간이었다.

 

(* 2015년 산청한방약초축제는 5월1일부터 10일까지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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