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속 진주

"돌아,돌아 지금도 우니?"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13. 12. 16.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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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궁금했다. 그래서 옆으로 빠졌다. 진주에서 산청 가는 국도 3호선에서 명석면으로 빠졌다.

 

 

명석면사무소 앞에도 내 궁금증의 주인공을 빼닮은 돌 한 쌍이 서 있다. 우는 돌, 명석(鳴石)이라는 유래를 간직한 돌을 닮은 짝퉁이다.

 

때는 바야흐로 고려말로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진주성을 정비하였다. 광제암의 스님이 성 보수를 마치고 돌아가다 저만치에서 서둘러 걸어가는 돌을 만났단다. 사람도, 네 발 달린 짐승도 아닌 돌을. 돌에게 왜 그렇게 급히 가느냐고 물었더니 진주성을 쌓는데 밑돌이 되기 위해 간다고 했단다. 스님은 이미 공사가 끝나 소용없다고 했더니 돌은 진주성의 밑돌이 되지 못한 게 서러운지 크게 울었다. 스님은 돌의 애국심에 감복하여 큰 절을 올렸다고 전한다. 세월이 흘러 운돌은 명석면의 자랑이요, 지역명이 되었다.

 

면사무소 지나 10여 분 후 신촌마을 앞 삼거리. 왼편으로 진주미술관이 나온다. 누룽지 백숙도 파는 음식점 겸한 미술관에 들렀다. 진주 모 대학 교수가 사비로 지은 미술관에서 아담하게 구경했다.

 

 

왔던 길 돌아 다시 10여 분. 왼쪽으로 광제서원을 알리는 갈색 표지판이 나온다. 지금은 남양 홍씨 재실로 사용하는 서원은 고려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 광제서원까지 가는 길은 호젓하다. 승용차 하나 겨우 지나 가는 길. 누구에게도 드러나지 않는 은밀한 나만의 비밀 장소라도 되는 양 조용하다. 중간에 만난 저수지도 반갑다. 서원 입구에 다다르면 수십 년이 된 커다란 은행나무가 이파리 모두 떨구고 서 있다. 나무 아래 후손인 홍석원 씨가 나무를 패고 있다. 도끼 한 번 내리칠 때면 사방의 고요를 깨우고 나무 파편이 튀며 쩌어억하고 벌어진다. 낯선 사람의 출연에도 놀라는 기색이 없다. 오히려 누렁이만 저만치에서 소리 내어 짖는다. 사람 내음 그리운 곳인지 살갑게 먼저 반긴다.

 

더러 여기 구경하러 옵니다.”며 스스로 광제서원을 안내에 나섰다.

서원은 처음에는 홍복사(洪福祠)였으나 1747년 홍지암(洪池庵)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1891년 중수하면서 모원재(慕遠齋)로 개칭하여 남양 홍씨 문중의 재실로 사용해왔다. 1976년 영남유림들이 광제서원으로 격상시켜 해마다 음력 310일 고려은청광록대부 상서 홍의(洪毅)와 고려금자광록대부 수상공상서 보문각, 태학사 홍관(洪灌)에게 춘향(春享)을 올린다. 목조건물은 고려 초기의 건축 형태를 잘 보여 준다. 덕분에 서원 곳곳을 구경했다.

 

구경을 마치고 나서는 데 홍호연 선생에 관한 동화책을 선물로 받았다. 홍호연 선생은 (조선은 임진왜란이라 애써 낮춰 불렀지만)동북아국제전쟁 때 2차 진주성 싸움에서 12세에 왜군의 포로가 되어 일본에서 유학과 글씨를 가르쳤다고 한다. 선생의 후손들은 지금도 홍()씨 성을 쓰고 있다. 몇 년 전 일본에 있는 후손들이 우리나라를 찾아 남양 홍씨 사람들을 420년 만에 만났다. 실로 420년만의 귀환이다. 차를 세워둔 은행나무 앞으로 다가서니 슬며시 이끈다. 비닐하우스에 꾹쿡한 메주가 익어가고 있었다. 진해에 있는 아내와 함께 만들어 내다판다고 한다. 낯선 사람에게 자기의 모든 것을 드러내고 자랑하고 싶은 모양이다.

 

길 돌아 10여 분. ‘토종 100% 국산 소나무 숲길이라는 광제산 등산로를 알리는 선간판이 보인다. 한국전쟁을 비롯해 땔감으로 우리 소나무가 사라졌다. 미국에서 빨리 자라는 리기다소나무를 들여와 토종 소나무 빈자리를 대신했다. 이곳에는 물 건너 소나무를 심을 필요가 없었나 보다. 광제산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다. 2004년 무너진 돌무더기를 이용하여 원형대로 복원함으로써 전국에서도 원형이 살아있는 몇 안 되는 봉수대다. 지리산과 삼천포 와룡산이 보인다.

 

 

산에 오르지 못하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5분 여. 드디어 운돌, 명석을 만났다. 명석은 비바람을 피하라고 후대 사람들이 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실제 음력 33일이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제사를 지낸다.

경상남도민속자료 제12호인 운돌 한 쌍은 남자 거시기와 여자의 족두리를 닮아 자웅석(雌雄石)이라 한다. 남자 거시기를 닮은 돌의 높이가 97cm, 둘레 214cm. 족두리를 닮은 돌은 높이 77cm, 둘레 147cm. 다산(多産)과 풍요(豊饒)를 빌던 선돌(立石)이었다. 어떻게 애국심 가득한 명석이 되었는지 궁금했었다. 오는 동안 궁금증은 사라졌다. ‘우는 돌이면 어떻고 자식 많이 낳아 주는 돌이면 어떤 가. 나는 이미 돌 앞에 서 있고 세 아이의 아빠인 것을.

 

단지, 묻고 싶다.

돌아,돌아, 지금도 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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