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속 진주

100여 년 전의 통신수단에서 내 그리운 집을 찾다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13. 3. 1.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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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어디세요? 봉수대? 그긴 뭐하는 곳인데요?”

 

봉수대로 올라가는 길에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점심무렵이라 봄방학을 맞은 녀석이 점심을 어떻게 챙겨줄 것인지 물어보는 참이다. 이렇게 손쉽게 누구나 집 안과 밖에서 쉽게 전화로 연결되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게 얼마나 되었을까? 100여 년 전의 통신수단을 찾아 길을 나섰다.

    

오늘 오르는 진주 망진산 봉수대는 172m의 망진산 정상에 바로 아래에 있다. 남강에서 바라보면 망진산 위에 우뚝 솟은 KBS방송국 중계소 방송탑이 마치 진주의 상징처럼 보이지만 그 아래에 한때 외적의 침입 등을 알리는 통신수단이었던 봉수대가 자리잡고 있는지는 모르는 경우가 많다.

 

   

 

봉수대 가는 길은 천수교를 건너 하동방면으로 틀자 말자 나온다. 이제는 소임을 다한 경전선 폐선을 지나 야트막한 산자락의 옹기종기 붙은 집들 사이의 골목을 지나 올라가면 그만이다. 승용차를 이용해 봉수대 바로 아래까지 올 수 있다. 물론 월경사 등지에 차를 세우고 숲길로 차근차근 걸어서 올라와도 좋다.

 

   

 

 

진주 10경 중 하나인 망진산 봉수대는 진주에 살면서 자주 찾곤 했다. 결혼 전후로 찾았을 때는 의미가 달랐다.

 

 

결혼 전, 데이트 할 때는 진주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탁트인 곳에서 사랑을 속삭였다. 결혼 후에는 저 많은 집들 중에 우리 가족이 살 집 하나 없나하는 아쉬움 속에 바라보곤 했다. 지금은 시간의 세월을 켜켜이 않은 채 여유롭게 찾았다.

 

1895년 전국의 봉수제를 폐지하면서 조선 초에 만들어진 망진산 봉수대도 기능을 잃었지만 1894년 동학농민항쟁과 1919년 삼일만세운동 때 사용했다고 한다. 그 뒤 일제는 전국의 봉수대를 파괴하거나 훼손을 했다고 한다.

 

 

시민 2000여 명의 성금으로 1995년 복원되어 양귀비보다 더 붉은 마음을 가졌던 의기 논개가 순국한 강낭콩보다 더 푸른 남강을 바라보고 있다. 봉수대 앞 단 위에는 한라산과 지리산, 진주 월아산, 독도, 백두산 등에서 가져온 다섯 개의 돌들이 놓여 있다. 금강산돌 이라는 표지 뒤로는 돌이 없다. 통일 되는 날이 어서 와서 그 빈자리를 빨리 채우길 기원했다.

 

   

 

봉수대에 한 켠에는 펜촉을 형상화한 비가 하나 있다. <신현수 선생 송공비>. 이 비는 1932년 당시 천전리(현 망경동) 사람들에게 교육을 장려하고 국민계뭉운동에 앞장선 신현수 선생(1893~1961)의 공덕으 후세에 전하기 위해 섭천못(현 망경초등학교 자리) 주변에 세워졌다. 지역개발로 섭천못이 매립되는 바람에 몇 차례 옮겨졌다가 방치된 것을 2003년 망경동 일대가 바라보이는 이곳에 새롭게 단장해 옮겼다. 신현수 선생은 특히 백정 해방운동에 나선 시대를 앞선 인권계몽가였다. 지금은 모두가 높고 낮음이 없이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당연한 인권이지만 백정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다. 백정도 우리 인간과 다름없다는 너무도 당연한 권리를 일깨우는 형평운동에 나선 분이다. 하지만 당시 천대 받던 백정들이 선생의 공을 기리며 세운 비석이 부모가 백정이었다는 멍에를 숨기고자 하는 후예들이 비를 천덕꾸러기로 만들어 총림사 입구에 방치되어 오다 이렇게 이전해 현재에 이른다.

비에는 아래와 같이 적혀 있다(안내판에는 원래 한문으로 적힌 시를 한글로 번역해 놓아 읽기 편하게 되었다).

무슨 공이 크다고 하느냐 이에 식견이 열렸어라/아침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배우며 마음을 수고롭게 힘을 다하여/천전리 마을 중의 남녀 모두가 밝은 곳이라 이러더라/ 여러 사람이 비를 이루어 시를 새기고 새겼노라

    

 

봉수대에서 250m거리에 있는 정상까지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진주시내를 가로지르는 남강과 시내정경을 바라보는 감상에 걸음은 쉬 옮기지 못한다.

 

 

파노라마가 아니라면 시내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도 어렵다.

 

    

 KBS방송탑을 보면 문득 고등학교 때 오리무중김무중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진주는 음기가 강하다. 비봉산을 비롯해 주위 산세가 너무 부드럽고 아늑하다. 그래서 여성들의 기가 세다.

 

 

 

망진산이나 진양호 한복판에 서울의 남산타워나 부산 용두산 전망대처럼 높은 탑이 세워지면 음양의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을까하셨다. 아쉽지만 방송탑이 양기를 복돋우고 있지는 않는지 문득 선생님께 여쭤보고 싶다.

 

 

 

정상에는 운동기구들이 놓여 있는 쉼터가 있다. 등산이라고 하기에는 산은 높이를 자랑하지 않고 산책이라고 하기에는 산은 바닷바람보다 시원한 탁 트인 전경을 드러낸다. 이곳에서 물문화관이 605km,석류공원 5km,보덕암 1.4km에 있다. 알면 보이고 보이면 사랑한다더니 진주에서 나고 자랐지만 나는 진주를 알지 못했고 알지 못했기에 제대로 사랑하지 못했다. 오늘은 내 승용차로 왔다만 언제 좋은 날 걸어서 두루두루 진주를 살펴보리라 다짐했다.

    

 

 

남강변에서 바라보는 망진산은 그저 산이다. 하지만 산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어떤지 한

번 지금 느껴보시라. 결혼 전후의 심정이 달랐고 40대의 지금이 다르듯...

      

 

이글은 경상남도 인터넷신문 경남이야기와 함께합니다.

http://news.gsnd.net/news2011/asp/news.asp?code=0300&key=20130228.99001133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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