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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에 가면 웃어야할까? 울어야 할까?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12. 11. 1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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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임진왜란 7주갑이다. 60년이 지나 다시 첫해로 돌아오는게 주갑 즉 환갑이다.임진왜란이 발발해 환갑을 맞은지 7번을 맞았다. 즉 420년이 된 해다. 우리는 임진왜란이라 부른다.  일본은 분로쿠노에키(분로쿠의 전쟁), 중국은 항왜원조라 부르는 '동아시아 7년 전쟁'은 분명 국제전쟁이고 한중일 삼국의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크나큰 생채기가 남아 있다. 특히나 침략을 받아 전쟁터가 된 우리에게는 더할 수 없는 고통이 있었다. 중국은 명나라가 망하고 청이 들어서고 일본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는 격변을 겪었다. 정작 우리는 쭈욱 그대로 선조의 후손들이 그대로 왕위를 계승했다. 책임을 진 이가 없었다. 

 

 

동아시아 7년전쟁에서 경남 진주시에 위치한 '진주성'은 우리에게 '진주대첩'으로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기억된다. 또한 의기 논개가 떠올려지듯 진주대첩 이듬해에 7만 군관민이 죽음으로써 진주성은 또한 패배의 쓰라림도 함께 존재한다. 진주성에 가면 우리는 승전을 기억하며 웃어야할까 아님 패전을 떠올려 울어야 할까?

 

이런 의문을 가지고 진주성의 정문인 공북문을 들어섰다.

 

 

공북문을 들어서자 오른편에 충무공 김시민장군 동상이 반긴다. 충무공하면 이순신 장군을 떠올리지만 충무공의 시호를 김시민장군도 받으셨다. 전쟁이 일어나자 진주목사로 임명되어 3800여 명으로 6일 동안 3만여 일본군을 물리친 제1차 진주성전투, 진주대첩의 영웅이다. 전투 중 적이 쏜 총에 맞아 전투 끝나고 두 달 뒤 순국하셨다.

 

 

두 번의 '진주성 전투'가 벌어진 진주성내는 전쟁의 생채기를 노랗고 빨간 가을 옷으로 뒤덮고 있었다.

 

 

왜장을 껴안고 의기 논개가 투신한 강낭콩보다 더 푸른 남강에는 시간의 흐름처럼 모두를 안고 흘러흘러 오늘도 흘러간다. 푸른 남강에 세워진 진주성벽 뒤로 천자,지자,현자 총통이 당시를 떠올리게 한다.

 

 

 

진주성내에는 임진왜란 전문박물관인 국립진주박물관에서 9월25일부터 2월2일까지 진주성전투 특별전을 하고 있다. 박물관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곽재우를 비롯해 당시 전쟁에 임한 이들의 각오가 비문에 새겨져 있다.

 

 

박물관에 들어서 전시실로 올라가는 길에는 전쟁 발발 전후의 연대기가 세계역사와 함께 올라가는 길 위로 있어 한눈에 살펴보기 싶다. 전쟁이 비단 '난리'즉 왜란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전쟁 당시의 조선과 일본군 장수의 복장을 비롯 조선,일본,중국의 무기류를 한눈에 비교해 살펴볼 수 있다.

 

 

삼혈포,불씨를 손으로 점화, 발사하는 유통식 화기의 일종으로 3개의 총구가 있다. 3발을 동시에 장전·발사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무기류를 비롯해 전쟁 때 일본의 조총이며 포들이 전시되어 화력도 비교했다. 화력비교와 함께 진주성 1차 전투에서 3천여 조선군이 3만의 일본군을 이길 수 있었던 배경을 살펴볼 수 있다.  물론 이듬해 10먄의 일본군이 쳐들어와 패배하고 7만 군관민이 죽임당한 역사도 살펴볼 수 있다.

 

 

거북선과 판옥선으로 무장한 이순신장군이 이끄는 조선수군에 막혀 곡창지대 호남으로 진출하지 못한 일본군이 선택한 길이 진주성.

또한 우리가 배운 임진왜란, 동아시아 7년 전쟁을 일본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살펴볼 코너도 있다. 일본교과서 속에 비친 전쟁이 그것이다. 일본 중등 사회과정의 역사부분 교과서는 모두 8종이다. 이 교과서들은 대개 임진왜란을 하나의 작은 항목으로 다루고 있다. 대부분의 교과서에서는 임진왜란을 조선침략이라는 제목아래 도요토미의 대륙 정복 야망과 조선침략의 과정, 조선 백성들의 저항, 이순신의 활약, 도자기술의 일본 유입 등을 언급하고 있다. 다만 가장 우익적인 성향을 띠고 있느 후쇼사에서 출판한 교과서는 조선으로의 출병이라는 항목으로 서술하고 있어 차이를 보인다.

 

 

내성과 외성으로 되어 있는 진주성과 읍내의 당시의 진주성 모형물. 내성은 정비·복원되어 있으나, 외성 및 연못은 진주시가지로 변해 있다. 촉석루를 비롯하여 영남포정사문, 서장대, 북장대, 촉석문 등은 현재 원 위치에 남아 있거나 또는 복원되었다. 성 밖에 관아, 객사, 향교, 감옥, 의곡사 등이 그려져 있는 데 그 중 향교와 의곡사가 남아 있다.

 

 

친일파 이은호가 1955년 그린 논개 초상이 사당 '의기사'에 당당하게 걸렸다가 시민들의 여론에  내려졌다. 친일파 이은호가 그린 논개 초상은 남원 춘향과 밀양 아랑과 비슷한 미인도에 지나지 않는다.  2007년 윤여환이 보다 당시 시대적 고증에 충실하게 다시 그려 국가표준영정으로 지정되었다.

소설 남춘향전이 마치 사실인양 우리에게 다가왔듯 지금 논개에 관한 명확하지 않는 이야기들이 오히려 더 사실인양 소설 등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논개의 이야기를 처음 기록한 책은 유몽인의 어유야담이다. 야담이지만 실제의 사례와 인물을 동시대의 인물이 적어 신빙성이 있는 책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논개의 출생이나 성장과정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책에 없었다. 후대에 와서 덧붙여져 전북 장수가 촐생지고 최경회의 부실이라는 것이 사실처럼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껴안고 죽은 왜장도 게야무라 로쿠스케라 알려지고 있지만 이 모든 것들이 추정일 뿐. 설화가 역사가 되어가는 요즘이다. 그럼에도 논개의 '의'는 부인할 수 없다.

 

 

 

 

진주지역 출판사 문화고을에서 펴낸 <진주성전투>와 진주박물관이 임진왜란 7주갑 특별전을 맞아 펴낸 <진주성전투>을 함께 읽어보면 진주성 전투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그런데 아쉽게도 두 권의 책은 쉽게 구할 수 없다. 인터넷서점에서도  아직 책이 판매되지 않는다. 좀더 시간이 필요할 지 모른다. 진주에 들렀다면 박물관에서, 진주문고에서 구매할 수 있다.

 

 

진주성을 찾으면 웃어야할 지 울어야 할지 한 번 고민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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