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하얼빈>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처단하고 순국한 의거를 다룬 영화입니다.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영화는 역사가 스포일러입니다. 그럼에도 어떻게 영화화했는지 궁금하기에 저 역시 영화를 관람했습니다.
주인공 안중근이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는 장면부터 시작하는 이 영화는 내내 사내 둘 이상만 모이면 연신 성냥을 그어 담배를 피웁니다. 담배 연기가 스크린 너머로 전해질 듯 자욱하게 자주 흡연을 권장합니다. 스크린 속 자욱한 담배 연기를 참으면서도 답답한 마음을 멈출 수 없는 장면이 있습니다.
안 의사가 의병장으로 활동하던 1908년 7월, 격전 끝에 사로잡은 일본군 병사들을 만국 공법에 따라 풀어주는 장면입니다. 극 중 안중근은 ‘진영으로 돌아가 지금 일본의 부당함을 선전할 것을 조건으로 무장까지 갖추어 석방’하기도 했습니다. 역사적 맥락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더욱 난감하게 다가옵니다. 왜냐면 풀어준 일본군이 다시금 본대를 이끌고 기습공격해 의병들의 많은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극 중 이창섭은 “거룩한 인품”이라고 안 의사를 말하지만 저는 순진하다고 생각합니다. 만국 공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국 공법》(萬國 公法, Elements of International Law)은 1836년에 헨리 휘튼이 출판한 소개한 국제법 안내서입니다.
만국 공법은 서구열강 중심의 세계관이 담긴 국제질서에 관한 법입니다. 문명국과 반문명국, 미개국으로 지구촌 국가를 구별하고 서열화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문명국은 주권 국가로 평등하게 화합하며 살자는 내용입니다. 이 법 속에는 다윈의 진화론을 잘못 이해하고 적용해 미개하고 약한 자를 강한 자가 지배하고 문명사회로 발전한다는 사회 진화론도 담겨 있습니다.
당시 조선 집권층은 만국 공법의 허구성과 무용성을 분명히 인식했음에도 조선의 미약한 국권을 이겨내기 위해 만국 공법에 많은 기대를 걸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헤이그 밀사 사건입니다. 1907년 5월, 대한제국 황제 고종은 제2차 한일협약의 부당함과 일본 제국의 침략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2차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준을 보냈습니다. 이후 일제는 이 사건 이후 고종을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습니다.
물론 헤이그 밀사 사건 이전에도 고종은 1904년 11월 민영환과 한규설을 통해 이승만을 미국에 파견하여 미국 대통령에게 국서를 전하게 했습니다. 러일전쟁 이후부터 군대 해산까지 무려 15차례나 각국에 밀사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만국 공법의 본질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탓에 바람처럼 성공할 수 없습니다. 오죽하면 1886년 4월 21일 자 <한성주보(漢城周報)>는 “부강(富强)한 자들이 자기들의 잘못을 합리화하고 남을 꾸짖는 도구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일본 근대의 선각자로 불리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4-1901)도 “만국 공법이 대포 한 방만도 못 하다”라고 했습니다.
1882년 4월, 영국과 수호 통상조약을 맺었지만 1885년 3월 러시아의 남하 막는다며 영국은 전라남도 여수시 거문도를 불법 점령했습니다. 조선 조정의 철회 요구와 국제 여론도 무시한 영국은 1887년 3월까지 약 2년여 동안 거문도에 군대를 주둔시켰습니다.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을 지냈던 독립운동가 박은식은 1906년 10월 대한자강회(大韓自彊會) 월보(月報)에 실린 「自强能否의 問答」에서 이렇게 묻습니다.
“하루아침에 외교가 단절되고 주권이 능멸되는 참상을 당했는데도 30여 년간 연호(聯好·우호를 맺는 것)한 체약국들이 나 몰라라 하고 있으니, 공법(公法)이 어디 있고 인도(人道)가 어디에 있느냐?”
미국과 조약을 체결하기만 하면 조선의 국권이 보호될 것이라는 환상을 품었던 당시 조선 집권층의 기대가 안쓰럽습니다.
영화는 완전무결한 영웅으로 안중근 의사를 그리지 않아 좋았습니다. 다만, 만국 공법을 잘못 이해한 실수를 명확하게 드러내지 못해 아쉽습니다. 아울러 오늘날 미국과 일본, 중국과 러시아 둘러싸인 한반도에서 진정한 평화란 무엇인지 생각을 다시금 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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