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21일 개봉한 뮤지컬 영화 <영웅>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사살하고 순국한 의거를 내용으로 하는 영화입니다. 거사를 준비하던 때부터 순국하기 마지막 1년의 안 의사를 담은 영화입니다.
역사적인 사실을 먼저 알고 가면 영화 관람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안 의사가 저격한 이토 히로부미는 누구인가?
이토는 일본제국의 헌법 기초를 마련하고 초대 내각 총리대신을 시작으로 5대, 7대, 10대 총리를 했습니다. 심지어 일본 총리보다 급이 낮은 초대 한국 통감을 1905년 할 정도로 한국 강제 지배에 앞장선 인물입니다. 이토는 러일전쟁 뒤처리 등을 논의하기 위해 러시아 제국 코코흐제프와 회담을 위해 러시아가 청 제국에게 일부를 빌려 일정한 기간 통치하던(租借·조차) 하얼빈에서 만날 예정이었습니다.
안 의사가 밝힌 이토를 처단한 15가지 이유
아래는 안 의사가 1909년 11월 6일 오후 2시 30분 일본 관헌에게 제출한 것입니다. 안 의사의 자서전 <안응칠역사(안중근기념관)>에 나온 내용입니다.
ㆍ1895년 일본 병정을 시켜 대한제국 황후 폐하를 시해한 일
ㆍ1905년 대한제국 황제 폐하를 위협하고 5조약을 맺은 일
ㆍ1907년 강제로 대한제국 황제 폐하를 폐위시킨 일
ㆍ산림, 광산, 철도, 어업, 농상공업권을 모조리 강탈한 일
ㆍ소위 제일은행권을 강제로 발행하여 전국 재정을 고갈시킨 일
ㆍ국채 1천 3백원을 강제로 대한국에 부담시킨 일
ㆍ대한국 학교의 서책들을 불태우고 내외국신문을 못보게 한 일
ㆍ국권을 회복하려는 대한국 의사들과 그의 가족 10만 명을 죽인 일
ㆍ대한국 청년들의 외국유학을 금지시킨 일
ㆍ5적 7적과 일진회가 짜고 대한국인이 일본의 보호를 받고자 원한다고 한 일
ㆍ1909년 다시 5조약을 강제로 맺은 일
ㆍ대한국이 일본에 속방되고 싶어 하는 것처럼 선전한 일
ㆍ2천만의 곡성이 천지에 진동하는데 대한국은 태평하다고 메이지 황제를 속인 일
ㆍ동양 평화를 깨뜨려 몇 억만 인종들로 하여금 장차 멸망을 면치 못하게 한 일
ㆍ1867년 6월 일본 메이지 황제의 부친을 죽인 일들
안 의사가 손가락을 자른(斷指·단지) 까닭은?
죽음을 각오한,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입니다.
‘1909년 2월 7일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결사 동지 김기룡, 백규삼, 황병길, 조응순, 강순기, 강창두, 정원주, 박봉석, 유치홍, 김백춘, 김천화 등 12인은 이곳 크라스키노(연추하리) 마을에서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단지동맹하다. 이들은 태극기를 펼쳐놓고 각기 왼손 무명지를 잘라 생동하는 선혈로 대한독립이라 쓰고 대한국 만세를 삼창하다.(문화재청 발간 <문화재사랑> 2019년 1월호 중에서)’
왜 넷째 손가락을 잘랐을까?
손가락을 자른 것은 죽음을 각오한 의지이기에 단지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비교적 사용량이 적은 넷째 손가락인 무명지(無名指)를 잘랐습니다.
안 의사는 왜 이토를 쏜 뒤 도망가지 않고 생포되었나?
안 의사는 이토를 저격한 뒤 도망가지 않고 “코레라 우라(대한민국 만세)”를 외쳤습니다. 안 의사는 이토가 한국을 뺏어간 파렴치한이라는 것을 알리려 했습니다.
안 의사는 재판에서 <전쟁>을 한 것이라고 주장했나?
의병 참모장으로서 적국의 수괴를 죽였다고 주장했습니다. 수년 전부터 항일 의병과 일본군은 교전 중이었기에 적국의 수괴를 사살한 전쟁이라 테러나 범죄가 아닙니다.
1심 재판이 끝난 뒤 왜 항소하지 않았나?
안 의사는 항소를 포기하는 대신 사형 집행을 늦춰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동양 평화론>을 써서 남기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 판단하고 히라이시 고등법원장에게 탄원하고 허락받았습니다. 하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동양 평화론>은 미완으로 남아 있습니다.
또 하나 이유는 어머니 조성녀 마리아의 영향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왜 유해는 국내로 들어오지 못했나?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국권의 회복되면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안 의사의 자서전 <안응칠역사(안중근기념관)>”
안 의사가 순국 직전 동생인 정근, 공근과 홍 신부에게 준 말입니다. 그럼에도 순국한 뒤에도 안 의사 유해는 하얼빈 공원 곁에 묻히지도 고국으로 돌아오지도 못했습니다. 일본은 안 의사 유해를 돌려주지 않고 임의로 암매장했습니다. 안 의사의 유언대로 하얼빈 공원에 묻힐 때 독립운동의 메카, 성지가 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안 의사 순국 시간이 왜 오전 10시인가?
안 의사는 3월 26일 오전 10시에 뤼순 감옥에서 돌아가셨습니다. 10시라는 시각에 맞춘 것은 이토가 안 의사에게 저격받고 30여 분 뒤 사망했기에 그 시각을 일본이 맞춘 겁니다. 일본의 복수입니다.
안 의사의 아들은 왜 개자식이라 불렸나?
안 의사의 차남 안준생은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30년 뒤 서울을 방문합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박문사(博文祠)를 찾아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과 만나 악수하며 아버지를 대신해 사과한다고 했습니다. 안 의사 아들의 변절에 당시 식민지 사람들은' 호부견자(虎父犬子, 호랑이 아비에 개새끼)'라며 욕을 했습니다.
사진자료 : 영화 <영웅>스틸컷
자료 : 안중근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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