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조식선생 발자취

칼 찬 선비, 그 스승에 그 제자- 내암 정인홍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17. 9. 19.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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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 해인사는 모두를 삼켜버리는 바다같다. 해인사의 드높은 명성에 가려 다른 곳은 눈길 한 번 제대로 받지 못 한다. 내암 정인홍 선생이 학문을 논하고자 세운 부음정도 그렇다.


가야산 해인사는 모두를 삼켜버리는 바다같다. 해인사의 드높은 명성에 가려 다른 곳은 눈길 한 번 제대로 받지 못 한다. 합천 해인사 가는 길에는 해인사 팔만대장경 못지않게 되뇌어볼 곳이 있다. 칼 찬 선비,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을 빼닮은 수제자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1536~1623) 선생의 흔적을 찾아 9월 6일 가야산으로 향했다.



가야산 주봉인 상왕봉 아래에 이르자 가야면 소재지가 나온다. 소재지를 벗어나 팔만대장경 테마파크에 못미처에 부음정이 있다.


가는 길에 일부러 차 안 조수석 발판에 빈 깡통 여러 개를 놓았다. 차가 이리저리 움직일 때마다 깡통은 서로 부딪혀 소리를 낸다. 남명 선생이 허리춤에 찬 방울 ‘성성자(惺惺子)’ 소리가 울리고 울릴 때마다 몸가짐을 살피고 반성했던 그 마음을 흉내라고 내고 싶었다.

저 멀찍이 매화산과 가야산 능선들이 이어지는 길은 기암괴석들이 고즈넉하게 반긴다. 가야산 주봉인 상왕봉 아래에 이르자 가야면 소재지가 나온다. 소재지를 벗어나 팔만대장경 테마파크에 못미처 차를 세웠다.



내암 선생이 45세 되던 해(1580년, 선조 13), 생가 옆에 작은 집을 짓고 '부음정(孚飮亭)'이다. ‘부음정’은 '술을 마심에 믿음이 있으면 허물이 없다(有孚于飮酒無咎)'라는주역에서 따온 말이다. 원래는 황산리 생가에 세웠지만 가야천 건너 야천리에 옮겨져 있다.


내암 선생이 45세 되던 해(1580년, 선조 13), 생가 옆에 작은 집을 짓고 '부음정(孚飮亭)'이다. ‘부음정’은 '술을 마심에 믿음이 있으면 허물이 없다(有孚于飮酒無咎)'라는주역에서 따온 말이다. 원래는 황산리 생가에 세웠지만 가야천 건너 야천리에 옮겨져 있다.


선생은 술이 아니라 자연 속에 학문을 벗들과 학문을 토론하며 마음을 갈고닦겠다는 의지를 부음정기에 담았다. "성현의 글을 읽고 지난날의 훌륭한 언행을 알며, 절친한 벗들이 찾아와 서로 학문을 힘쓰게 하는 것이 마시는 밑천이다. 산에 걸친 구름, 물에 뜬 달, 흐리고 개는 변화하는 모양은 마실 때의 안주이다.…술을 마신다는 건 누룩으로 빚은 술에 의해 마음을 흐리게 하는 것을 비유한 게 아니다."



합천 부음정에 주차장 한쪽에 있는 내암 정인홍 선생 안내판은 빛바래 제대로 읽을 수 없었다.


아쉽게도 내가 찾은 날은 문집·경의검을 비롯한 각종 유물을 전시했다는 기념관은 굳게 닫혀 있고 안내판은 빛바래 제대로 읽을 수 없었다. 부음정 뒤편에 선생을 모신 '청람사(晴嵐祠)'를 몸을 굽혀 절했다. 그분을 뵙고 싶어 까치발로 담 너머 구경했다.


청람사 앞에 선생의 신도비를 지나 부음정으로 내려갔다. 다행히 수풀이 우거졌지만, 문이 닫혀 있지 않아 찬찬히 둘러볼 수 있었다. 마당에는 풀이, 부음정에는 먼지가 가득했지만 선생의 체취를 느껴보고자 앉았다.



내암 정인홍기념관


열다섯에 남명 선생 문하에 들어 "덕원(德遠, 정인홍 자(字))이 있으니 나는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남명 선생의 기대를 받았다. 내암 선생은 남명 선생이 평소 ‘내명자경(內明者敬)’과 ‘외단자의(外斷者義)’라는 글자를 새겨 항상 깨어있는 정신으로 매사에 거짓이 없고 도리에 어긋남이 없이 행동을 삼가는 경의검(敬義劍)을 물려받았다.



부음정 뒤편에 내암 정인홍 선생을 모신 '청람사(晴嵐祠)'.


‘정인홍은 합천 사람이다. 유년 시절에 조식에게 글을 배웠는데, 조식이 지조가 보통 아이와는 다른 것을 기특하게 여겨서 지경(持敬) 공부를 가르치니, 이로부터 굳은 마음으로 어려움을 무릅쓰고 공부하여 밤이나 낮이나 게을리 하지 않았다. 조식은 항상 방울을 차고 다니며 주의를 환기하고 칼끝을 턱밑에 괴고 혼미한 정신을 일깨웠는데, 말년에 이르러 방울은 김우옹에게, 칼은 정인홍에게 넘겨주면서 이것으로 심법(心法)을 전한다고 하였다. 정인홍은 칼을 턱밑에 괴고 반듯하게 꿇어앉은 자세로 평생을 하루 같이 변함없이 하였다.<선조수정실록]> 선조 6년 5월 1일’


동북아국제전쟁(임진왜란) 때 분연히 떨쳐 일어나 동문수학한 곽재우 등과 함께 의병장으로 일본군과 맞섰다. 경상우도 의병들을 총지휘하는 영남의병도대장(嶺南義兵都大將)을 맡은 내암 선생은 적의 후방을 교란 일본군의 낙동강 보급선을 차단하고 호남 진출을 막았다. 더구나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안전하게 지켰다.


그 스승에 그 제자답게 내암 선생은 스승인 남명 선생이 중종과 명종 선조 대에 걸쳐 열 두 번의 벼슬을 사양했듯 정1품인 우의정을 열다섯 차례, 좌의정 한차례, 영의정을 세 차례나 사양하며 고향 합천에 은거하며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내암 정인홍 선생을 모신 청람사(晴嵐祠)에서 부음정으로 내려 가는 길


인조반정이라는 쿠테타 세력에 의해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비했다는 ‘폐모살제(廢母殺弟)’로 모함 받아 88세가 되던 해 참형되고 재산은 모두 몰수당했다. 이후 285년간 서인과 노론 주도의 조선후기 내내 ‘패륜 역적’의 멍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부음정


스승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위상을 상대적으로 부각하려는 마음이 앞서 퇴계 이황 선생 제자들의 반감을 샀다. 77세(1611) 때 의정부 우찬성을 제수하자 사직상소를 올리며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 선생의 출처문제를 문묘 출향을 주장했다. 이 상소문으로 퇴계 선생의 후학들이 주류를 이루던 성균관 유생들과 갈등을 빚어 성균관 학적부에 삭제되고 퇴계학파와 깊은 골을 이루었다. 스승과 '남명학'을 터부시하는 결과를 만든 원인 제공자라고도 혹평받기도 했다.



부음정과 청람사


선생은 진정한 의리의 사나이였다. 의병으로 국가에 대한 의리를 지켰고, 왕에 대한 의리로 광해군을 보필했으며 스승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부음정을 돌아 나왔다. 작은 개울 옆 배롱나무가 선생의 절개인양 붉게 마지막 불꽃을 피우고 있었다. 부음정 위 청람사로 다시 올라왔다. 가야천 쪽에 세워진 정자에서 매화산과 가야산 풍광을 두 눈에 가득 담고 땀을 닦았다.



부음정 뒤편에 세워진 정자에서 바라본 풍경


‘묘소 520m’라는 이정표에 의지해 묘소를 찾았다. 이정표는 부음정 근처 그곳뿐이라 지나는 이에게 위치를 물어도 몰랐다. 다행히 길 건너 구구식당 옆 간판없는 구멍가게 아저씨가 일러준 길을 따라 뒤편 마을로 들어갔다. 마음 입구는 온갖 의미 없는 벽화가 어지럽다.



부음정 주차장에서 바라본 내암 정인홍 선생 묘소


묘소에서 묵례를 올리자 단재 신채호 선생이 벽초 홍명희 선생에게 쓴 편지가 떠올랐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내암 선생의 개혁 정신을 높이 평가해 1931년 여순 감옥에서 벽초 홍명희 선생에게 쓴 편지에서 ‘ "(을지문덕·이순신·최도통=최영傳은 집필했는 데) 이금(而今: 인제 와서)에 가장 애석(愛惜)하는 양개(兩個: 두개)의 복고(腹藁: 배 속 원고) '대가야천국고(大伽倻遷國考)'와 '정인홍공약전(鄭仁弘公略傳)'이 있으나, 이것들은 제(弟, 신채호)와 한가지로 지중(地中: 땅속)의 물(物)이 되고 말는지도 모르겠습니다"(조선일보 1936년 2월 28일, 벽초 '곡단재')‘라고 하며 우리나라 삼걸(三傑)로 을지문덕‧ 이순신‧ 정인홍을 꼽았다.



내암 정인홍 선생 묘소


배운 바를 실천하려 치열하게 노력한 내암 정인홍 선생이 꿈꿔던 조선, 우리 대한민국의 미래가 무언지 되뇌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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