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은 우리에게 역사가 남긴 흉터
422년 전 그날로 찾아간 경남 진주성 이야기
경남 진주시 동쪽에서 시내로 넘어가는 말티고개.
숨이 턱턱 막힐 만큼 더웠다. 머리에서 흘러나온 땀은 얼굴에 멈출 기세도 없이 그대로 흙바닥에 떨어졌다. 바싹 마른 흙은 내 땀방울을 흔적조차 없이 한껏 빨아들였다. 비가 온다는 일기 예보가 내려진 8월 11일, 이날은 또한 음력 6월 27일이다. 나는 이른 점심을 먹었다. 마치 연애하는 마음인 양 내 사랑을 만나러 가는 설렘에 오후 1시 정각 경남 진주시 하대동 집을 나섰다. 422년 전 오늘을 만나러 떠났다. 그날 진주성은 6만여 군관민이 왜적에 맞서 싸우다 순절한 날이다.
말티고개에서 내려다보이는 진주시내와 진주성
하대동 집을 나서 시내로 향하는 말티고개를 걸었다. 말티고개는 야트막한 듯해도 고개 중간 삼거리에 이르렀을 때는 숨이 가빴다. 붉은 장미가 힘겹게 올라온 나를 반겼다. 고개를 넘자 진주 시내가 보인다. 진주성이 건물 숲에 둘러싸였지만 초록빛으로 위치를 알려준다. 422년 전 오늘도 비가 내렸다. 오늘의 비는 불볕더위를 잊게 해주는 반가운 단비다. 그날도 그랬을까. 선학산으로 향하는 나무들 사이로 잠시 비를 피했다. 한줄기 소나기라면, 이 순간만 피하면 그만이다. 그날 진주성에 모인 사람들 모두는 나와 같은 바람이었을지 모른다. 어서 이 소나기 지나가기를. 그러나 비는 멈출 기세가 없다. 배낭에 방수씌우개를 덮고 비를 맞으며 걸었다.
동북아국제전쟁 당시 진주성의 동문이었던 진주 장대동 놀이터.
말티고개를 넘자 옥봉삼거리다. 옥봉삼거리 오른편에 고려 시대 강감찬 장군을 도와 거란군을 크게 물리친 강민첨 장군을 기리는 은열사가 나왔다. 은열사를 지나 진주성으로 한 걸음 더 옮겼다. 유독 매미 소리가 자지러지는 곳, 장대동 놀이터다. 그날 이곳은 진주성 동문이 있던 곳이다.
동북아 국제전쟁 당시의 진주성(「조선시대 진주성 규모와 모양의 변화」)
(음력) 6월 29일 미시(오후 1~3시) 동문 쪽 성벽이 비로 인해 무너지자 일본군이 개미떼같이 올랐다. 이종인이 군사들과 창검으로 적을 치니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일본군이 물러가서 다시 신북문에서 돌진해 오자 조선 군사들이 무너져 달아나 모두 촉석루에 모였다. 적군이 몰려오자 모든 군사가 흩어졌다.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김천일을 부축하며 피하기를 권하였지만 “나는 마땅히 여기서 죽겠다”고 아들 상건과 고종후 등과 함께 북향재배 하고 남강에 투신했다. 최경회 역시 남강 투신했다. 이종인, 이잠, 강희열 등 십여 인은 장검을 휘두르면서 끝까지 싸우다 순절했다. (국립진주박물관 발행 『진주성 전투』 중에서)
진주성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수정봉과 옥봉 뒤로 말티고개로 동북아국제전쟁 때 일본군이 쳐들어왔다.
장대동 놀이터는 그날의 흔적을 전혀 살펴볼 수 없다. 근처에 건물 옥상에 올랐다. 내가 넘어온 말티고개가 저만치 보이고 바로 앞에는 수정봉과 옥봉이 보인다. 가야시대 고분군이 있는 이 자리에 왜군은 진을 치고 진주성을 향해 조총을 난사했다고 한다.
동북아국제전쟁(임진왜란) 당시의 일본군 진격로.( 진주 문화를 찾아서『진주성 전투』중에서)
전쟁 당시의 옛 진주성을 따라 길을 걸었다. 지금은 중앙로터리로 향하는 4차선 길이 성벽이 서 있던 자리다. 빗방울이 굵어졌다. 광복절을 앞두고 거리에는 태극기가 내걸렸다. 건물 처마 밑에서 비를 피했다. 건너편 버스 타는 곳에는 채소를 팔기 위해 전을 펼친 아주머니가 그냥 그대로 비를 맞으며 손님을 기다린다. 다행히 굵어졌던 비가 가늘어졌다. 중앙로터리 쪽으로 걸었다.
경남 진주시 중앙로터리. 동북아국제전쟁(임진왜란) 때 이곳에는 진주성의 신북문이 있었다.
중앙로터리 주위는 신북문 자리다. 중앙로터리는 4차선 길이 남과 북, 동과 서로 교차한다. 현재의 중앙로터리는 진주교와 일직선으로 뚫려 있다. 당시에는 신북문과 남문이었다. 전쟁을 불과 1년 앞두고 진주성을 확장했다. 오늘의 진주성은 내성(內城)만 그나마 남아 있고 외성(外城)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남아 있지 않다. 중앙로터리에서 진주교육지원청 쪽으로 걸었다.
진주성의 해자 역할을 하던 대사지. 일제강점기 이곳은 매립되어 진주교육지원청 등이 들어섰다. ( 진주 문화를 찾아서『진주성 전투』중에서)
진주우체국과 진주경찰서, 진주교육지원청에 이르는 길에는 플라타너스가 심겨 있다. 플라타너스 넓은 잎사귀가 시원시원하다. 이 일대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밖을 둘러 파서 못으로 만든 해자(垓子)가 있던 진주 대사지(大寺池)가 있던 곳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대사지는 신라 혜공왕 2년(766)에 강주 관서(진주성)의 대사(大寺)라는 절이 있던 곳의 동쪽 땅이 점점 꺼져 연못이 생겼다고 한다. 그 연못의 크기는 세로가 13척이고 가로가 7척(약 390cm⨯210cm) 이었는데 난데없이 잉어 5~6마리가 생겨나 점점 커지면서 연못도 따라 커졌다고 한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진주성 2차 전투 때의 왜적 배치도. ( 진주 문화를 찾아서『진주성 전투』중에서)
진주성 2차 전투 때는 왜군에 의해 부분 매립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 읍장이 진주성벽을 허물어 매워 진주초등학교, 진주경찰서, 진주우체국, 옛 진주시청 등이 들어섰다. 당시의 흔적은 조선 시대 그림이나 일본 강점기 사진에서만 엿볼 수 있다. 현재는 진주교육지원청 앞에는 대사지를 알리는 안내판만 서 있을 뿐이다.
아쉬움을 달래고 진주성 공북문으로 향했다. 식당과 여관 사이로 성문이 보인다. 진주성의 정문에 해당하는 공북문 성벽에는 큼지막한 걸개그림이 걸렸다. 오는 13일(음력 6월 29일)의 ‘진주성 계사순의 위령제’를 알리고 있었다. 이날은 진주성 2차 전투에서 성이 함락한 날이다. 공북문을 지나면서 고개 들어 천정을 보았다. 청룡과 황룡의 모습이 여의주를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동북아국제전쟁(임진왜란) 진주대첩의 영웅, 충무공 김시민 장군 동상.
공북문을 지나자 오른편에 높이 7m의 충무공 김시민 장군 동상이 나온다. 진주성 1차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역이다. 전쟁이 일어나자 진주 목사로 임명되어 3,800여 명으로 6일 동안 3만여 일본군을 물리친 제1차 진주성전투, 진주대첩의 영웅이다. 전투 중 적이 쏜 총에 맞아 전투 끝나고 며칠 뒤 순국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 그런데도 만약 김시민 장군이 1차 전투에서 순국하지 않고 살았다면 2차 전투는 어떠했을까. 동상 건너편 나무 아래에서 숨 고르면서 지도자의 역할을 떠올렸다. 스스로 일을 헤아리고 할 수 있는 능력인 ‘깜냥’이 2차 전투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징비록』에서도 패인의 원인 중 하나를 진주 목사의 깜냥을 거론했을까.
‘진주 목사 서예원은 판관 성수경과 함께 명나라 장군 접대하는 지대차사원으로 오랫동안 상주에 있다가 적이 진주로 향한다는 소식을 듣고 허둥지둥 돌아왔다. 그것이 적이 성을 포위하기 겨우 이틀 전이었다.’
진주성도.(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성을 방어하고 지켜야 할 목사와 판관은 명나라 장군을 접대하기 위해 성을 오랫동안 비우고 이틀 전에 겨우 입성했다.
‘김천일이 거느린 군사란 것도 모두 서울 저잣거리에서 모집한 무리였고, 김천일 자신은 병법도 알지 못하면서 지나치게 자기 의견만을 내세웠다. 그는 평소 서예원을 미워했다. 그래서 주인과 객이 서로 질시하게 되어 서로 다른 호령을 내렸다. 이런 이유로 크게 패한 것이다.’
1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김시민 목사가 당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였던 유숭인을 성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휘 계통에 혼란이 온다는 이유였다. 1차⋅2차 진주성 전투의 성공과 패인의 가장 중요한 원인을 살필 수 있다. 사공이 많으면 배는 산으로 가지만 전투는 패전뿐이다.
진주성 임진 대첩 계사순의단(晋州城壬辰大捷癸巳殉義壇)
걸음을 동상 반대편 순의단 쪽으로 옮겼다. 성벽 주위에는 백문동 꽃들이 보랏빛으로 무리 지어 피었다. 순의단이 나오는 촉석광장 한쪽에는 천자총통을 비롯한 총통들이 전시되었다. 전시된 총통 뒤로 비석 두 개가 서 있다. 하나는 ‘김시민 장군 전공비’고 2차 전투 때 순절한 이들을 기리는 ‘촉석정충단비’다. 이 비석이 서 있는 이곳도 일제 강점기에는 신사가 세워져 우리 겨레의 정신을 억압했다.
이제 비는 부슬부슬 내렸다. 계단을 하나하나 밟으며 진주성 임진 대첩 계사순의단(晋州城壬辰大捷癸巳殉義壇)으로 올랐다. 진주성에 오면 더구나 순의단에 서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른다. 소수의 병력으로 적의 대군을 물리친 진주대첩과 외부 지원도 없이 고립무원으로 철저하게 버림받아 처절하게 항전하다 끝내 순국한 곳이 진주성에서 겹치기 때문이다.
진주성 임진 대첩 계사순의단(晋州城壬辰大捷癸巳殉義壇) 아래에 돋을 새김으로 새겨진 논개 순절모습.
순의단 옆으로는 진주성 전투 모습이 돋을 새겨져 있다. 찬찬히 둘러보는데 심장 쿵쿵 뛴다. 승전과 패전이 겹쳐 가슴을 저리게 한다. 만약 일본군이 제시했던 공성(空城)책에 따라 진주성을 지키지 않았다면 일본군은 진주성을 거쳐 그 길로 전라도 방면으로 침략했을 것이다. 호남지역이 모두 적의 수중에 떨어질 수 있었다. 1차 진주성 전투와 달리 2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성 밖에서 도와주는 의병이 없었다. 의병장 곽재우 장군마저도 진주성을 비우는 게 상책이라고 했다. 진주성은 열 배가 넘은 일본군과 싸운 중과부적의 싸움터였다. 1차 전투와 달리 외부 지원도 없이 고립무원으로 철저하게 버림받아 처절하게 항전하다 끝내 순국한 곳이다.
동북아국제전쟁 제 1차 진주성 전투 (국립진주박물관 발행 『진주성 전투』 중에서)
1차 전투는 음력 10월 4일(1592년 11월 7일)에 일어났다. 2차 전투는 장마철인 음력 6월 22일부터 29일까지다. 장마철에 성벽이 무너지고 조선군의 활이 비에 무뎌졌다. 그럼에도 김천일을 비롯해 의병들이 9일 동안 진주성을 지키면서 일본군의 기력을 소진하게 시킨 덕분에 호남이 모두 점령되는 것만은 막을 수 있었다.
“진주는 호남의 울타리다. 진주가 없으면 호남도 없고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
순의단을 나와 남강 변에 세워진 촉석루로 향했다. 의암으로 내려갔다. 남강은 그날처럼 오늘도 흐른다. 의암에서 문득 이스라엘 ‘마사다’가 떠올랐다. 이스라엘 남동부에 있는 고대 산성 마사다는 서기 73년 로마군에 포위당한 채 2년간 항전하던 유대인들이 로마의 공격으로 성이 무너지자 로마의 노예 되기를 거부하고 1,000여 명의 유대인 전원이 자결한 곳이다. 이스라엘 신임 장교들은 “마사다는 다시는 정복되지 않는다.”는 충성맹세를 하며 임관식을 치른다고 한다.
동북아국제전쟁 진주성전투를 재현한 부조
의암에서 의기사로 갔다. 친일파 이은호가 1955년 그린 논개 초상이 사당 '의기사'에 걸렸다가 시민들의 여론에 떠밀려 내려졌다. 당시 시대적 고증에 충실하게 그려진 논개의 초상이 2007년부터 걸려있다.
진주 남강과 의암바위.
전쟁 후 광해군과 삼남 지역을 돌아본 유몽인은 『어우야담』에서 논개에 관해 이렇게 적었다.
‘논개는 진주의 관기였다. 만력 계사년(1593)······ 마침내 성이 짓밟히자 군사는 패하고 백성들은 모두 죽었다. 논개는 몸단장을 곱게 하고 촉석루 아래의 가파른 바위 위에 서 있었는데 바위 밑은 깊은 강물이었다. 여러 왜병이 (논개를) 바라보고 좋아했지만, 감히 접근하지 못했는데 왜장 하나가 당당하게 앞으로 내달았다. 논개가 웃으면서 맞이하니 왜장도 그를 꾀어내려 하는데, 논개가 드디어 왜장을 끌어안고 강물로 몸을 던져 함께 죽었다.’
1955년부터 진주성 의기사에는 걸려 있던 친일파 이은호가 그린 논개 초상은 시민들의 여론에 떠밀려 내려렸다. 시대적 고증에 충실하게 그려진 논개 초상이 2007년부터 걸려 있다. (사진 오른쪽)
춘향전이 마치 사실인양 우리에게 다가왔듯 지금 논개에 관한 명확하지 않은 이야기들이 오히려 더 진짜인 척 소설 등으로 우리에게 알려졌다. 논개는 죽고 난 뒤에 기억하고 싶은 사람들의 관점에 따라 이야기가 덧붙여져 왔다. 논개의 출생이나 성장 과정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정확한 근거가 없다. 후대에 와서 덧붙여져 전북 장수가 출생지고 최경회의 부실이라는 것이 사실처럼 우리에게 알려졌다. 껴안고 죽은 왜장도 ‘게야무라 로쿠스케’라 알려졌지만, 이 모든 것들이 추정일 뿐이다. 설화가 역사가 되어가는 요즘이다. 그러나 ‘의(義)’를 실천한 여인, 논개의 정신은 결코 거짓이 아니다.
우리의 아픈 역사를 딛고 선 천혜의 요새, 진주성을 찾으면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다. 잊지 말아야할 역사를 간직한 이곳에는 무심히 서 있는 나무 한 그루에도 그날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진주성은 우리에게 역사가 남긴 흉터다. 시간이 지나면 그날의 기억은 점점 흐려진다. 그러나 흉터를 보면 당시를 떠올린다. 아프지만 기억해야 할 우리 역사다. 역사를 기억하지 않으면 흉터는 언제라도 되풀이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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