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속 진주

저울처럼 평등한 세상을 꿈꾸다-형평운동의 발자취를 찾아서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25. 4. 15. 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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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울처럼 평등한 세상을 꿈꾸다-형평운동의 발자취를 찾아서

 

 
사람들은 고기와 가죽은 필요했지만, 짐승을 잡는 우리는 필요하지 않았다.”
형평사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며 2023년 5월 13일부터 7월 16일까지 국립진주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린 <공평과 애정의 연대, 형평운동> 특별전 영상물 <너와 내가 다르지 않음을 외치던 순간>의 글귀가 아직도 귓가를 울립니다.
 

 
근대 인권운동의 효시이기도 한 형평운동은 백정 해방 운동이기도 합니다. 백정이란 인도의 불가촉천민에 맞먹는 천민 집단이었습니다. 백정 남자들은 장가를 들어도 상투를 틀지 못했고 여자는 결혼해도 비녀를 꽂지 못했습니다. 백정은 고려시대에 양수척 또는 화척을 불리던 사람들로 유목과 수렵 생활한 거란인이나 여진인에 그 유래를 두었습니다. 이들은 일정한 거주지를 두지 않고 사냥하거나 버드나무로 만든 유기를 만들어 팔면서 생업을 유지했는데 천민의 대우를 받았습니다.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철폐되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백정에 관한 차별은 사라졌다고 해도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조선이 일본에 강제 병합되고도 차별은 여전했습니다. 호적에는 도살업 하는 자라는 뜻의 <도한(屠漢)>이라는 글자가 굵은 글씨로 새겨져 있었습니다.
 

억압과 차별 속에 신음하던 천민 신분이던 백정들이 1923년 4월 24일 직접 ‘저울’(저울대 형(衡), 평평할 평(平)) 처럼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형평사’를 조직했습니다. 양반 출신이지만 사회 변혁에 나섰던 강상호(姜相鎬)·신현수(申鉉壽)·천석구(千錫九) 등과 백정 출신으로 차별을 타파하려던 장지필(張志弼), 이학찬(李學贊) 등이 주도했습니다.
 

 
1923년 4월 30일 자 조선일보에 따르면 형평운동 관련 계급 타파 운동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진주(晋州)에형평사발기(衡平社發起) 계급타파(階級打破)를절규(絕呌)하는백정사회(白丁社會) 진주(晋州)에형평사발기(衡平社發起) 계급타파(階級打破)를절규(絕呌)하는백정사회(白丁社會) 우리도이세상사람의일분자이니 압박멸시게급을타파하자는운동~”
 

 
1935년에 이름과 성격이 바뀌기까지 13년간의 인권운동입니다. 한때는 전국의 단위 조직체가 1백62개, 활동가는 9천6백88명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진주에는 형평운동의 흔적이 곳곳에 있습니다. 진주 시내로 나가면 옛 도심답게 발자취를 만나기 어렵지 않습니다.
 

 
중앙시장 근처 옛 진주극장. 임대와 매각을 알리는 걸개가 을씨년스럽지만 일제 강점기에는 진주극장(당시 진주좌(晉州座))처럼 여럿이 모이기 좋은 곳도 드물었습니다. 그곳에서 형평사 창립 축하식이 열린 곳입니다.
 

 
한쪽 모퉁이에 먼지를 뒤집어쓴 스테인리스 조형물이 보일 듯 서 있습니다. 여기는 1923513일에 형평사 창립 축하식이 열린 곳이다. 여러 곳의 지도자들이 모인 이 행사로 말미암아 형평사의 활동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백정의 신분 차별을 바로잡고자 일어난 형평운동은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려는 인권운동의 한 선구지요, 금자탑이다.”
 
몰에이지1030 주식회사가 쇼핑몰 건물을 신축하면서 형평운동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건축조형물에 그 당시의 비문을 옮겨 기록했다고 합니다.
 

 
손톱깎이를 닮은 메뚜기를 형상화해 풀잎에 맺힌 이슬과 조화를 이루는 모양새입니다. 풀잎에서 굴러 내린 이슬에는 백정들의 신분 해방 운동을 상기하고자 하는 내용도 담긴 듯합니다.
 

 
옛 진주극장을 지나 진주중학교 옆에 있는 진주교회를 찾았습니다. 3.1만세운동 때 진주 하늘을 울렸던 종이 걸려 있습니다. 옆으로 진주교회 비젼관이 있습니다. 건물 곁에는 작은 ‘진주에서 최초로 일반인들과 백정들이 함께 예배본 교회’라는 안내판이 우리를 반깁니다.
 

1909년 라이올(한국명 나대벽) 선교사는 한때는 천대받던 백정 신자들을 차별하여 따로 예배드리는 것이 평등 인권사상에 어긋난다고 하여 함께 예배드리도록 했습니다. 이에 반발한 일반인들이 교회를 떠났지만, 스콜스와 켈리 두 선교사의 설득으로 결국 화해해 함께 예배를 보았습니다. 하느님 앞에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사상을 확인하고 똑같은 인간으로 대우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습니다. 14년 후 형평운동으로 발전하는 경험이었습니다.
 

 
진주교회에서 다시금 경상남도문화예술회관으로 향했습니다. 진주 8경 중 하나인 뒤벼리 풍경이 곱습니다. 봄바람에 수양버들이 한들한들 초록빛 춤을 춥니다.
 

 
강변 야외무대 근처 <청소년 푸른 쉼터>라는 표지석 주위로 다양한 조형물들이 있습니다.
 

 
조형물들 사이로 앞으로 나아가는 배 형상의 조형물이 나옵니다. 두 손을 맞잡은 남녀 조형물이 나오는 형평운동기념탑입니다.
 

 
탑의 한쪽 옆면에는 “인간 존엄, 인간 사랑”, 다른 한쪽 옆면에는 “자유 평등, 형평 정신”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공평(公平)은 사회(社會)의 근본(根本)이요, 애정(愛情)은 인류(人類)의 본량(本梁, 본래 타고난 양심)이라.”라는 빗돌에서 형평사 창립문이 인권운동의 현장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두 줄기의 나란한 기둥이여/ 영원히 평등과 자유의 정신을 높이 찬양하여라./ 칠십 수년 전 이곳 진주의 선각자들은/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 사랑 정신을 드높여 선포하였다./ 우리는 모두 존경할 수 있고 존경받을 수 있는/ 생명의 존엄 그 자체이다./ 가진 자도, 못 가진 자도, 배운 사람도, 못 배운 사람도/ 늙은이도, 젊은이도, 그녀도, 그이도, 모두/ 이 평등의 문을 나서라./ 우리는 모두 두 손을 꼭 잡고 저 남강 앞에/ 저 태양을 향해 평등과 자유의 정신만이 있을 뿐이다.”
 

 
1996년 12월 10일 세계 인권 선언일에 맞춰 형평운동 기념탑이 원래는 진주성 촉석문(동문) 앞에 세워졌습니다. 탑은 1,500여 명의 회원과 진주 시민들의 자발적인 성금으로 만들었는데 글씨는 솔뫼 천갑녕, 조각은 심정수가 각각 맡았습니다. 일제 강점기 형평사 창립 축하식이 열렸던 옛 진주극장 앞에 세우려 했지만, 터가 좁고 땅값이 비싸 진주성 동문 앞에 건립했습니다. 이마저도 2017년 현 진주대첩 광장 조성 사업으로 인해 지금의 위치로 임시 이전해 현재에 이릅니다.
 

1996년 진주성 외성 터였던 그곳에 있는 까닭이 천민 신분이라 진주성으로 들어갈 수 없었던 백정들의 혼을 달래고자 했던 의도이기도 했습니다. 제자리로 가지도 못하는  형평운동 기념탑을 보면 사람이되 사람으로 대우받지 못했던 백정의 처지가 떠오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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