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속 진주

충절의 고장, 진주 충절의 뿌리를 가다-우곡정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20. 2. 22.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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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절의 고장진주 충절의 뿌리를 가다-우곡정


 


충절의 고장, 진주 충절의 뿌리인 우곡 정온 선생이 조선 태조의 역성혁명에 반대해 귀향해 지은 우곡정.

 

진주를 가리켜 충절의 고장이라고 합니다. 동북아국제전쟁(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진주성 전투와 의기 논개의 순절 등이 충절을 드러낸 좋은 사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보다 앞서 충절을 몸소 실천한 분이 있습니다. 바로 우곡(隅谷) 정온(鄭溫, 1324~1402) 선생입니다. 충절 정신의 원류입니다.

 


진주 우곡정은 숲속에 있어 아늑하다.

 

사봉면사무소 뒤쪽 작은 산 중턱에 우곡정(隅谷亭)이 있습니다. 고려 후기 대사헌을 지낸 우곡 선생이 조선 태조의 역성혁명에 반대해 두문동 등에서 은거하다 낙향하여 1393(태조 2) 지은 정자입니다. 1849(헌종 15) 중수하고 1976년 중건했습니다.

 


진주 우곡정 앞에 있는 연못은 우곡 선생이 낚시하던 곳이라 한다.

 

우곡정 옆에 재실 입구 문간채에 불이문(不二門)이 붙어 있습니다.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어원을 따서 지었다고 전합니다.

 


진주 우곡정 앞 연못가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오는 이들을 반긴다.

 

들어서는 입구에서부터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습니다. 남으로 굵은 가지를 뻗은 나무 아래에는 작은 연못이 있습니다.

 


진주 우곡정 앞 연못에는 몸 하나에 머리가 세 개인 돌거북이 있다.

 

몸 하나에 머리가 세 개인 돌거북이 못 가운데 있는 연못은 우곡 선생이 낚시하던 곳이라고 합니다.

 


진주 우곡정의 솟을대문에는 절의문(節義門)이라 적혀 있다.

 

우곡정 왼편에 신도비가 있고 솟을대문에는 절의문(節義門)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정면 3, 측면 2칸의 3량 구조 팔작지붕 집인 진주 우곡정은 대청을 가운데에 두고 좌우에 방이 있는 누()마루 형식이다.

 

선생의 충절을 떠올리며 안으로 들어가자 정면 3, 측면 2칸의 3량 구조 팔작지붕 집이 나옵니다. 대청을 가운데에 두고 좌우에 방이 있는 우곡정은 누()마루 형식입니다. 땅에서 높이 올라와 있지 않습니다.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두른 툇마루에 앉아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키며 살아온 선생의 뜻을 떠올립니다.

 


진주 우곡정

 

태조는 우곡을 불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사위인 이제(李濟)를 보내 모셔가려고 하자 차마 왕명을 거역할 수 없었던 우곡 선생은 눈은 떠 있어도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청맹과니)이라는 핑계를 대고 사양했습니다. 이에 이제가 시험 삼아 솔잎으로 우곡의 눈을 찔렀는데, 눈동자가 찔리며 꿈적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선혈만 낭자했다고 전합니다.

 


진주 우곡정 툇마루에서 바라본 풍경

 

정자 한쪽에 우곡 선생의 충절을 기려 쓴 이제의 시가 적혀 있습니다.

松葉豈能撓確節(송엽기능요확절) 솔잎이 어찌 곧은 절개를 꺾을 수 있으랴

令名千載日爭光(령명천재일쟁광) 그 이름 천년토록 햇빛같이 빛나리

 


진주 우곡정 뜨락에 핀 붉디붉은 동백은 진주 충절의 뿌리인 우곡 정온 선생을 떠올리게 한다.

 

후대 사람들은 포은 정몽주의 죽음과 야은 길재의 은둔, 우곡 정온의 청맹(靑盲)을 공자가 말씀한 은나라 삼인(은유삼인殷有三仁)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충절의 고장, 진주에서 충절의 의미를 되뇌기에는 우곡정만 한 곳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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