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이야기

가슴 깊은 곳까지 온기가 스며드는 평안한 돌담길 마을,산청여행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17. 1. 19.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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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름다운 마을 1, 경남 산청 남사 예담촌

 

오늘도 내일도 해는 뜨고 진다. 그러나 12월 해는 다르다. 우리가 편하자고 만든 시간 구획의 한 해 끝자락이다. 올 한 해를 정리하기 바쁜 때다. 그러면서도 온전히 지나온 추억을 정리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1227, 어머니와 함께 추억 여행을 떠났다. 소담 소담 걷기 좋은 돌담길이 좋은 경남 산청 예담촌으로 향했다.

 


어디를 보아도 어깨를 맞댄 돌담이 아름다운 경남 산청 예담촌

 

예담촌에 도착하자 눈 시리도록 파란 하늘과 맞닿은 흙돌담길이 어서 오라 먼저 손을 내민다. 어디를 보아도 어깨를 맞댄 돌담이다. 한 집의 담을 따라가면 또 다른 집 담이 이어져 어깨동무한다. 돌담길에 햇살이 드리운다. 햇살은 돌담의 그림자와 함께 경계를 이룬다. 돌담 사이로 속삭이는 햇살을 벗 삼아 어머니는 마을 안으로 들어간다. 마을을 굽이도는 돌담길에서는 어머니 걸음도, 시간도, 바람도 천천히 흐른다.

 


산청 예담촌 기산 박현봉 생가에 세워진 기산국악당

 

음나무가 텅 빈 하늘을 향해 한껏 휘적거리며 가지를 뻗었다. 어머니는 닫힌 대문 틈새로 몸을 한껏 붙여 내밀한 집안을 들여다본다. 여기저기 따사로운 장작 타는 냄새가 모락모락 하얀 연기와 함께 피어오른다. 마을을 구비 도는 개천은 맑고 투명한 소리를 내며 흐른다. 다리 하나를 건넜다. 꺼비 닮은 바위가 반기는 실개천을 건너자 백의종군 중이었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하루 묵고 갔다는 이사재가 나온다. 이사재로 향하지 않고 먼저 왼쪽에 있는 기산국악당으로 먼저 걸음을 옮겼다.

 

기산국악당은 기산 박헌봉(1906~1977) 생가에 세워져 있다. 민족음악 진흥을 꾀한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생가를 복원하고 기산관, 교육관, 전시관을 건립해 기산국악당이라 이름 지었다. 문을 들어서기 전부터 은은하게 국악 소리가 들린다. 교육관에는 신발 여러 켤레가 툇마루에 놓여 있다. 교육관과 기산관 사이에는 선생의 흉상이 우리를 반긴다. 기산관을 지나 전시관으로 들어갔다.

 


기산국악당 전시관에서 만난 대나무 채로 호랑이의 머리를 세 번 치고는 나무톱을 꼬리쪽으로 한번 훑어 내리며 음악의 끝을 장식하는 타악기 ‘. 호랑이가 이렇게 정겹게 보이기는 처음이다.

 

선생상() 반기는 옆에는 ‘~어두운 거리에 횃불을 밝혀라 잃었던 국악을 다시 찾자는 선생이 지은 <국악의 노래>가 펼쳐져 있다. ’국악의 노래를 지나자 귀여운 호랑이가 마치 꼬리 흔드는 강아지마냥 앉아 있다. 대나무 채로 호랑이의 머리를 세 번 치고는 나무톱을 꼬리쪽으로 한번 훑어 내리며 음악의 끝을 장식하는 타악기 . 호랑이가 이렇게 정겹게 보이기는 처음이다.

 


기산국악당 전시관에서 어머니는 헤드폰을 꽂아 국악기라 들려주는 가락을 들었다. 흥에 겨운지 어깨를 들썩이며 마스크 쓴 너머로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 옆에는 네모진 나무통 위에 구멍을 뚫어 나무 방망이를 꽂은 이 보인다. 아악연주에서 시작을 알리는 타악기다. 국악기가 이렇게 많은지 처음 알았다. 어머니는 헤드폰을 꽂아 국악기라 들려주는 가락을 들었다. 흥에 겨운지 어깨를 들썩이며 마스크 쓴 너머로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국악당을 나와 옆으로 옮겼다. ‘이사재에 올랐다. ‘이사재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며 한때 전쟁의 영웅이라 칭송받았던 처지에서 한순간 역적으로 몰린 장군의 마음을 헤아렸다.

 


산청 남사예담촌 꺼비 닮은 바위가 반기는 실개천을 건너면 백의종군 중이었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하루 묵고 갔다는 이사재가 나온다.

 

마을 둘레길이 나온다. 어머니는 성큼성큼 실개천을 따라 걷기 좋게 마련돼 마을 둘레길을 걷는다. 햇살이 바람과 함께한다. 사람에 놀랐는지 청둥오리들이 푸드덕 날갯소리를 내며 개천을 박차고 날아간다.

 

지역 특산물인 산청 딸기를 비닐하우스에 재배하는 부부가 점심 먹으러 집으로 돌아가는 사이로 조선 시대 선비이자 독립운동가인 면우 곽종석 생가 이동서당유림독립기념관이 보인다. 기념관에 들어서자 정면에서 파리장서가 동판과 한글번역본으로 걸려 있었다.

 


산청 남사 예담촌은 마을 둘레길이 잘되어 걷기 좋다.

 

파리장서1919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평화회의에 면우 곽종석 선생 등 유림대표 137명이 서명하여 대한민국의 독립을 호소한 2,674자의 독립청원서다. “종석 등은 차라리 목을 함께 모아 죽음으로 나아갈지언정 맹세코 일본의 노예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굳은 의지를 드러내며 끝맺고 있다. 세계 평화회의에 대한민국 독립을 호소한 파리장서를 주도한 면우 곽종석 선생과 137명 유림의 결기가 뿜어져 나왔다.


산청 남사 예담촌에 있는 <유림독립운동기념관>

 

왼편에 태극기를 휘날리며라는 제목 아래 우리의 국기, 태극기 설명이 나온다. 태극문양은 음(파랑)과 양(빨강)의 조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우주 만물이 음양의 조화로 인해 생명을 얻고 발전한다는 대자연의 진리를 표현한 것이다. ‘, , , 는 각각 하늘과 땅과 물과 불을 상징한다.

 

오른편 전시관 내부로 들어가면 나라가 망했는데 선비로서 이 세상을 사는 것은 큰 치욕이라는 유림, 세상에 고하다라는 큰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물결처럼 일렁이는 유림의 독립운동에 관한 안내 글과 사진 자료가 마음 깊은 곳에서 안으로 이끈다. 책을 덮고 일제에 저항해 의병을 일으키거나 망명길에 올라 독립운동에 투신한 500년 조선의 역사를 이끌어온 유림의 굳센 지조를 살펴볼 수 있다.



산청 남사 예담촌에 있는 <유림독립운동기념관> 내에는 프랑스 파리에 독립호소문을 보낸 당시를 마차에 앉아 영상물로 관람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선비의 고장, 산청에 독립의 불길을 솟구친 사상의 배경으로 남명 조식(1501~1572) 선생을 돌아보는 코너가 있다. 평생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칼을 품고 방울을 달아 자신을 경계하며 실천하는 삶을 살았던 유학자 남명선생.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동북아국제전쟁(임진왜란) 때 홍의장군 곽재우를 비롯해 가장 많은 의병장을 배출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곽종석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폐기와 조약 체결에 참여한 매국노를 처형하라고 상소했다. 1919년에는 삼천리 방방곡곡에 3·1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전국 유림의 궐기를 호소했다. 제자 심산 김창숙(金昌淑, 18791962) 등과 힘을 모아 프랑스 파리에 독립호소문인 파리장서를 보냈다. 선생은 그 일로 투옥되어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선비의 고장, 산청에 독립의 불길을 솟구친 사상의 배경으로 평생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칼을 품고 방울을 달아 자신을 경계하며 실천하는 삶을 살았던 유학자 남명 조식 선생을 돌아보는 코너가 있다.

 

좁은 공간에 사람을 감금하여 앉을 수 없고 움직일 수 없도록 고통을 주었던 고문을 체험해보는 벽관 고문체험’. 좁은 벽관에 몸을 넣기도 불편하지만 움직일 수 없는 고통을 체험했다.

유림독립기념관을 나와 바로 담장을 사이에 두고 있는 이동서당(尼東書堂)에 들렀다. 일직문(一直門)이란 현판을 내건 대문을 지나 서당 안으로 들어섰다. 이동서당은 유림과 제자들이 남사마을 사람들과 함께 일제의 서슬 퍼런 총칼에도 굴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한 곽종석 선생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서당이다.



돌담길이 아름다운 산청 남사 예담촌에는 기산국악당, 이사재, 유림독립운동기념관이 함께 어우러져 가장 평안한 마음으로 가슴 깊은 곳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다.

 

차가운 바람이 돌담길을 따라 지난다. 그런데도 옆에 함께 있는 어머니의 체온 하나로 고마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근처에서 가져간 주전부리를 먹었다. 가슴 깊은 곳까지 따뜻한 온기가 스며든다. 오늘, 숨 한 번 제대로 쉬었다. 가장 평안한 마음으로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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