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속 진주

스쳐 지나갈 뻔했던 길에서 내일 걸을 역사를 만났다- 경남 진주 집현면 장흥리 숙종 사제문비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16. 12. 13.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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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지나칠 뻔했다. 아무도 눈길을 제대로 주는 이 없다. 바람을 가르며 쌩하고 지나갈 뿐이다. 경남 진주에서 합천으로 가는 일반국도가 4차선으로 확장되면서 이 길은 더욱 사람들의 눈길과 발길이 줄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할 강직한 이의 넋을 달래는 비문이 있다.

 


<진주 장흥리 숙종 사제문비(肅宗 賜 祭文碑)>는 경남 진주에서 합천가는 옛길에서 만날 수 있다.

 

 

124, 일요일 아침. 늦게까지 잠을 자는 가족 몰래 집을 나왔다. 명신고를 지나 옛 합천 가는 길을 따라 올라갔다. 경남예술고를 지나 5분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서 차를 세웠다. 비록 옛길이라고 하지만 차들이 여전히 오가며 바람을 일으킨다. 관광버스 주차장으로 쓰이는지 넓은 공터에 덩그러니 작은 기와집이 보인다. 한눈에 봐도 재실이거나 비각인듯한 모양이다.

 

낯선 이를 경계하는 개 짖는 소리에 잠시 놀라기도 했다. 작은 누렁개는 오히려 내가 반가운 듯 가까이 다가왔다. 비각 주위를 반송들이 빙 두르고 있다. 반송 사이로 하얀 냉이가 계절을 잊고 피었다. 비각 앞에 안내판을 찬찬히 읽었다.

 


<진주 장흥리 숙종 사제문비(肅宗 賜 祭文碑)>를 구경하러온 낯선 이를 경계하는 개 짖는 소리에 잠시 놀라기도 했다. 작은 누렁개는 오히려 내가 반가운 듯 가까이 다가왔다.

 

<진주 장흥리 숙종 사제문비(肅宗 賜 祭文碑)>1857(철종 8) 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 장흥리에 세워진 비다. 이 비석은 연산군의 세자 시절 스승으로서 강직한 성품으로 인해 연산군 즉위한 뒤에 억울하게 참형을 담했던 지족당(知足堂) 조지서(趙之瑞 : 1454~1504)에게 숙종이 즉위 44년인 1718년에 예조좌랑 이안국을 보내 치제한 제문을 1857년 정규원이 글씨로 돌에 새겨 신당서원(新塘書院)의 묘정에 세워둔 것이다. 신당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사라지고 사제문비만 남았다.

 


지족당 지조서에게 내린 숙종 사제문을 번역한 안내판.

 

비석 옆에는 제문을 번역한 안내판이 이해를 돕는다.

 

조지서(1454(단종 2)1504(연산군 10)는 본관은 임천으로 호가 지족당이다. 연산군 때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가 1506(중종 원년) 관직이 회복되고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진주 장흥리 숙종 사제문비(肅宗 賜 祭文碑)>

 

제문을 번역한 안내판에는 국왕은 신하 예조좌랑 이안국을 보내어, 증도승지(贈都承旨) 조지서의 영전에 유제하노라~서연(書筵)에 재직했으니, 직책은 보덕(輔德)이었다네. 사악함을 막고 착함을 펼치고, 이치 나타내고 욕망은 막았네. 동궁이 생각지도 듣지도 않으니 마치 물에다 돌 던지는 격이었네. 벽에다 쓴 여섯 개 글자는, 보는 사람들 얼굴빛이 변하였네.~말의 기운은 더욱 엄하게 하고, 강학 권유를 날로 강하게 했네. 사람들은 나를 위해 두려워하지만, 나로서는 나의 직책 다해야겠도다. 어지러이 뒤집힌 시대 만나서, 몸이야 시골로 돌아왔지만, 충직한 것 탈로 잡아, 그 원한 혹독했도다. 마침내 사화에 걸려들어, 자신은 죽임 당하고 일족 멸하니, 하늘과 땅이 캄캄해졌다네.~애써 지킨 충절과 곧은 지조는, 쇠처럼 단단하고 화살처럼 곧았네. 행실은 세상의 으뜸가는 스승이 되고, 문학은 세상의 본보기가 되었다네.~제관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노니, 영은 이르러 흠향(歆饗)하시기를.(경상대학교 허권수 교수 번역)’고 적혀 있다.

 

비각을 나와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길 건너 작은 연못가로 걸었다. 겨울 철새는 나와 저의 거리가 가깝지만, 연못을 건너 자신에게 못 올 것을 안 것인지 유유히 한 발로 서서 지 할 일을 한다. 연못을 거닐며 선생의 삶을 돌아보았다.

 

조선 시대 성종은 학문과 명망이 높은 두 명에게 세자(연산군)를 교육을 맡겼다. 조지서와 허침이다. 두 명의 성격을 대조적이었다. 연산군은 툭하면 수업이 불성실한 자신을 성종에게 고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조지서를 싫어했다. 허침은 부드럽게 타이르곤 했다고 한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연산군편에 실린 조지서 관련 자료.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연산군은 어느 날 벽에다 "趙之瑞大小人(조지서대소인),許琛大聖人(허침대성인)" 이라고 낙서를 했다고 한다. 이 낙서는 쓴 훗날의 연산군은 1504년 갑자사화 때 조지서를 먼저 죽였다.

 

같은 책 기록에 따르면 임금(연산군)이 세자로 있을 때 허침은 필선(세자 교육을 맡아보던 세자시강원 정사품 벼슬)이 되고 조지서는 보덕(세자시강원 종삼품 벼슬)이 되었다. 폐주는 날마다 유희만 일삼고 학문에는 전연 마음을 두지 아니하였는데, 다만 성종의 훈계가 엄함을 두려워하여 서연에 억지로 나올 따름이었다. 동궁의 관원이 비록 마음을 다하여 강의하여도 모두 귀 밖으로 들었다. 조지서는 천성이 굳세고 곧아서 매양 나아가 강의할 때마다 책을 앞에 던지면서, “저하께서 학문에 힘쓰지 않으시면 신은 마땅히 임금께 아뢰겠습니다.” 하니 폐주가 매우 고통스럽게 여겼다. 허침은 그렇지 않고 부드러운 말로써 조용히 깨우쳐 주었으므로 폐주가 매우 좋아하였다. 그리하여 벽 사이에 크게 써 붙이기를,“조지서는 큰 소인이요, 허침은 큰 성인이라.”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이는 조지서를 위하여 매우 위태롭게 여겼다. 폐주가 왕위에 오르고 갑자년의 화가 일어나자 먼저 조지서를 베어 죽이고 그 집을 적몰하였다. ’고 한다.

 

선생의 묘는 하동군 옥종면 대곡리 삼장골에 있다. 삼장골은 과거시험에 3번이나 장원한 인물이 난 마을이라는 뜻이다. 삼장원의 주인공인 선생이 난 마을로 선생은 21살에 생원 시험에 장원하고 진사시에는 2등이었다. 원래는 장원이었는데 생원시도 장원이라고 한 등급 낮췄단다. 이후 26살엔 중시에도 장원으로 합격했다. 선생의 묘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부인 정 씨를 기리는 정려비가 있다.

 


강직한 성품으로 신하 된 도리를 다한 지족당 조지서 선생의 비각 주위에서는 향이 퍼진다. 신하와 임금이 각자의 도리를 다했다면 굳이 국민들이 초를 들고 찬바람 부는 거리로 나갈 일은 없었을 것이다.

 

숙부인 정씨는 갑자사화로 한순간에 노비 신분으로 전락했다. 두 아들과 조상 위패를 모시고 삼년상을 몰래 치르고 중종 때 복권되어 정려를 받았다.

 

남명 조식 선생이 쓴 <유두류록>에는 부인은 적몰(籍沒)되어 죄인이 되었으나 젖먹이 두 아이를 끌어안고 등에는 신주를 지고 다니면서 아침저녁으로 상식(上食)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절개와 의리를 둘 다 이룬 경우가 여기에 있다 하겠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강직한 성품으로 신하 된 도리를 다한 선생의 비각 주위에서는 향이 퍼진다. 한 해를 보듬은 들판으로 향내가 퍼진다. 신하와 임금이 각자의 도리를 다했다면 굳이 국민들이 초를 들고 찬바람 부는 거리로 나갈 일은 없었을 것이다. 스쳐 지나갈 뻔했던 길에서 오늘 그리고 내일 걸을 역사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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