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천만 관객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스크린 속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저는 오래 마음에 남습니다. 영화에서는 능청스럽게 등장한 유해진 배우가 그렇습니다. 영화 속에서는 마을 촌장으로, 엄홍도로 나옵니다. 기록 속 이름은 다릅니다. 영월 호장(戶長) 엄홍도(嚴弘道)입니다.
영화가 남긴 질문, 기록 속 엄홍도

호장은 고려와 조선 시대 지방 관청 향리 가운데 가장 높은 직위입니다. 중앙 명령을 현장에서 집행하는 행정 실무 책임자입니다. 세조 2년(1456)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었을 때 엄홍도는 영월 관아 실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세조 3년(1457) 10월. 단종은 영월 관풍헌에서 생을 마칩니다. 관찬 기록은 이를 자결로 적었습니다. 이후 전해진 기록은 다른 장면을 전합니다. 단종의 시신은 동강에 버려졌다고 합니다.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명령이 내려졌다는 전승이 남아 있습니다.
강가에는 아무도 나가지 못했습니다. 관원도 백성도 두려움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엄홍도는 강가로 갔습니다.
동강의 밤, 왕의 시신을 거둔 아전

야음을 틈타 아들들과 함께 동강으로 나갔다고 전합니다. 물 위에 떠 있던 시신을 건져 올렸다고 전합니다. 왕의 몸이었습니다. 아전의 손이 왕의 시신을 들어 올린 순간이었습니다.
시신은 영월 북쪽 산으로 옮겨졌다고 전합니다. 초겨울이었습니다. 눈이 쌓인 산이었습니다. 산중에서 사슴이 앉았다가 일어난 자리만 눈이 녹아 있었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습니다. 그 자리를 파 장사를 지냈다고 전합니다. 녹침지(鹿寢地)라는 이름이 여기서 나옵니다.
장례 과정의 세부 장면은 당대 1차 사료에서 모두 확인되지는 않습니다. 문중 기록과 야사에서 전해진 전승입니다.
확인되는 사실은 따로 있습니다.
숙종 24년(1698) 단종이 복위됩니다. 이후 편찬된 『노릉지』와 『숙종실록』에는 “영월 호장 엄홍도가 시신을 거두어 산골짜기에 암장했다”라는 기록이 등장합니다. 국가 기록이 그의 행동을 인정한 순간입니다.
장례 이후 삶은 흐릿합니다. 『영월엄씨 족보』와 문중 기록은 영월을 떠났다고 전합니다. 계룡산 부근 은거설이 있습니다. 동래와 울산을 떠돌았다는 전승도 있습니다. 이동 경로를 보여주는 당대의 1차 사료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후손들이 울산에 머물며 세운 원강서원이 전합니다.

시간이 흐른 뒤 역사는 다시 이름을 불렀습니다.
숙종은 그의 충절을 기려 공조판서를 추증했습니다. 사후 약 200년 뒤 일입니다. 정조 15년(1791) 영월 장릉 배식단이 세워졌습니다. 단종을 위해 목숨을 건 인물들이 함께 모셔졌습니다. 엄홍도의 이름은 정충벽 수석에 놓였습니다.
정조는 후손도 찾았습니다. 『정조실록』 기록입니다. 후손 가운데 어질고 능력 있는 사람을 골라 관직에 쓰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부역 면제도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한 사람의 선택이 가문의 신분을 바꾸었습니다.
오늘 영월 장릉에 가면 엄홍도의 이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육신과 생육신을 배향한 영월 창절서원 창절사에 엄홍도의 위패도 모셔져 있습니다. 충절의 이름으로 남은 공간입니다.

영화 속 엄홍도는 촌장입니다. 기록 속 엄홍도는 호장입니다. 법을 집행하는 지방 관리였습니다. 엄홍도는 왕명의 체계 안에 있던 관원이었습니다. 세조의 권력이 작동하던 행정 체계 안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 체계 안에서 왕명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법이 아니라 사람의 도리를 택했습니다. 체제 안의 관리가 스스로 법을 넘어선 사건이었습니다.
한밤 강가에서 그는 사람의 도리를 따랐습니다. 영화 너머 등장 인물에 좀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덕분에 여기에서 시간을 읽습니다.
▣ 주요 정보 요약
- 장릉(단종 능) :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190
- 창절서원 : (엄홍도와 사육신 등 배향)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60(영흥리)
- 의산서원 : (엄홍도 배향) 경북 문경시 산양면 위만리 109번지 , 474
- 원강서원 : (엄홍도 배향) 울산 울주군 삼동면 대밭길 37
※ 출처 :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컷 / 제작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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