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은 살아있다④ - 하동야생차박물관
이름만 떠올려도 싱그러움이 묻어나는 하동야생차박물관
이름만 떠올려도 싱그러움이 묻어나는 박물관이 있습니다. 하동야생차박물관이 그렇습니다. 박물관은 지리산 쌍계사 가는 길에 있습니다. 봄이면 벚꽃들이 활짝 피어 진분홍빛의 터널을 만듭니다. 꽃이 지고 난 뒤에는 초록빛의 무성한 나뭇잎들이 초록 터널을 만들어 일상의 묵은내를 날려버립니다.
하동 쌍계사 가는 길은 벚나무 초록 터널
하동읍 내를 지나 화개면으로 가는 길 역시 벚나무들의 터널들이 기분을 상쾌하게 합니다. 동행이 되어준 섬진강과 이별할 즈음에 화개장터가 나옵니다. 영호남이 하나 된 흥겨운 장터를 지나 본격적으로 지리산으로 가는 길은 넉넉한 어머니의 품처럼 편안합니다.
법하마을에서 쌍계사 벚꽃 십리 길은 두 가닥으로 나뉩니다. 오고가는 자동차 일방통행이 각각 위와 아래로 갈리지만 나뭇잎은 더욱더 무성합니다. 열린 차창 너머로 지리산에서 힘차게 내려가는 물소리가 청랑 합니다. 주위는 아늑합니다. 호리병 속 별천지라고 했던 고운 최치원 선생의 말씀처럼 속계(俗界)를 벗어나 선계(仙界)로 가는 기분입니다.
호리병 속 별천지로
초록 터널을 지나 쌍계사 입구를 앞두고 개울을 건너면 박물관이 나옵니다. 하천가에 자리한 박물관을 아늑한 풍경이 둘러싸고 있는 형상입니다. 박물관에 들어서자 다관과 찻잔 조형물이 먼저 방문객을 맞습니다. 차향이 스멀스멀 기어올라 몸과 마음을 채우는 듯합니다. 하천에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큰금계국들 덕분에 황금 나라에 온 듯한 착각도 잠시 합니다.
박물관 건물 속으로 걸음을 들여놓자 일상 속 긴장의 끈이 절로 풀립니다. 오른편에 있는 영상실로 먼저 향했습니다.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보통 있는 예사로운 일을 이르는 일상다반사(日常茶飯事) 이야기가 영상으로 펼쳐집니다.
일상다반사(日常茶飯事)가 펼쳐지다
덧붙여 “흥덕왕 3년(828) 12월에 대림이 당의 사신으로 갔다 오는 길에 차 종자를 가져와 왕명(王命)에 의해 지리산에 심었다.”는 삼국사기 기록과 함께 우리나라 차 역사가 눈앞에서 선보입니다. ‘차 한잔은 시원하면서도 순일한 차 본래의 맛이고, 두 번째 잔은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이며, 세 번째 잔은 인생의 본질적 괴로움에 대해 참오다’는 육우 <다경>에 나오는 구절은 차 한잔에 담긴 의미를 진지하게 떠올리게 합니다.
영상실을 나와 맞은편으로 향했습니다. 세계의 야생차와 다구 등을 중심으로 한 차 역사가 전시실을 가득 채워 우리 곁에 다가오지만 하동의 명인 쪽으로 먼저 눈길과 발길을 옮겼습니다.
지리산이 품고 섬진강이 기른 자연의 차를 공부하다
‘마음을 담아 차를 덖다’는 표현처럼 지리산이 품고 섬진강이 기른 자연의 차를 마시기까지 보통의 정성이 들어가는 게 아니라는 것을 배웁니다. 문헌 속 하동의 차에서는 추사 김정희의 시(차사이정쌍계(茶事已訂雙鷄) 구절이 입안에 맴돕니다.
‘쌍계사 봄빛, 오랜 차 인연(雙鷄春色茗緣長) / 제일 가는 두강차는 육조탑 아래에서 빛나네(第一頭綱古塔光) / 늙은이 탐냄이 많아 이것저것 토색 하여(處處老饕饕不禁) / 입춘에 다시 향기로운 김 보낸다고 약속했네(辛盤又約海苔香)’
중국 명차에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었던 쌍계사에서 만든 만허의 차를 받은 추사가 답례로 쓴 시입니다. 제주도 유배지에서도 시름을 잃게 만든 차가 입안에서 굴러다니는 느낌입니다.
예술로 승화된 찻그릇, 일상의 번뇌를 모두 잊게
‘예술로 승화된 찻그릇’이라는 표제 아래 놓여 있는 찻그릇들은 들여다볼수록 멍을 때리게 합니다. 일상의 번뇌를 모두 잊게 합니다. 세계 차 역사를 둘러보고 난 뒤 2층 전시실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신수유물전(新收遺物展)에서는 청자가 은은하게에 뿜어내는 단아한 빛의 유혹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겸재 정선이 그린 것으로 전하는 <교남명승>에 나오는 하동 신흥사와 불일암 폭포의 풍경은 조선 선비들의 지리산 유람을 떠올리게 합니다.
책을 멀리한 게 차 한 잔 마실 여유가 없었서
전시실 끄트머리에 걸린 풍경화는 산속에서 시를 짓고 차를 마시는 모습이 분명 속계를 벗어난 신선들의 나들이로 보입니다. 작자 미상의 독서도(讀書圖)에서는 차 한 잔의 여유와 더불어 책을 읽는 즐거움이 물씬 풍겨옵니다. 괜스레 책을 멀리한 게 차 한 잔 마실 여유가 없었다는 자책을 합니다.
하동명인 전시실로 향하자 먼저 고운 최치운 선생의 영정이 눈길과 발길을 붙잡습니다. 1793년 쌍계사에서 조성하고 봉안 <운암영당 고운선생 영정> 속 고운 선생은 유학자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후에 X선과 적외선 촬영에서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신선이 된 고운 선생이 두 명의 동자가 공양하는 모습이었지만 조선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에 따라 덧칠을 하며 유학자의 모습으로 바뀐 셈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세상을 내가 보고자 하는 창문으로만 보는 게 아닌 가 싶습니다.
화개에 발을 들여놓은 우리 자신은 이미 자유인
청학동을 찾은 기대승이 쓴 한시 “어찌하면 세속의 번잡함을 다 떨쳐 버리고서 / 공과 함께 푸른 하늘에서 노닐 수 있을까/”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합니다. 아직도 청학이 살고 있을 아름다운 화개에 발을 들여놓은 우리 자신은 이미 자유인입니다.
박물관을 나왔습니다. 차 체험장은 코로나19로 운영하지 않습니다. 기념품점으로 향했습니다. 작은 찻잔에 붉은 빛을 띤 물고기 한 마리 들어있는 찻잔을 샀습니다. 우려낸 녹차를 찻잔에 부으면 찻잔 속 물고기는 녹색 물을 거슬러 힘차게 헤엄치고 마시는 우리는 자유롭게 차 안의 세상에 머물듯 합니다.
<왕의 녹차> 전설
실내의 공간을 벗어난 박물관 주위는 볼거리가 많습니다. 지리산 자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먼저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지며 지납니다. 일상 속 번뇌가 사라지는 기분입니다.
<왕의 녹차 전설>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화단에서 눈길을 끕니다. 하동에서 진상한 찻잎에서 우려낸 찻물의 쓰디쓴 맛에 오히려 벌을 내렸다고 합니다. 꿈에 신령이 나타나 귀한 것을 알아보지 못한다며 왕을 나무란 뒤 왕은 직접 하동에 내려와 차나무를 찾았다고 합니다. <왕의 녹차>가 탄생한 내력이 바람결에 전해옵니다.
“화개 차밭에 불을 질러라”- 임금에게 차를 진상하기 위해 고초를 겪는 고려 민중
옆으로 문헌 속에 나타난 하동 녹차에 관한 글들이 빗돌에 병풍처럼 새겨진 뜨락이 있습니다. “화개 차밭에 불을 질러라”라는 백운 이규보(1168~1241)의 글 앞에서는 임금에게 차를 진상하기 위해 고초를 겪는 고려 민중의 안타까운 마음이 전해옵니다.
다시금 나무 사이로 난 산책길로 접어들자 시들을 새긴 빗돌들이 걸음걸음 붙잡습니다. “차나 머금세”라는 글귀는 세상사의 시름을 모두 잊게 합니다. 그늘막에서 숨을 고릅니다. 마음이 넉넉해지고 느긋해집니다. 박물관 주위는 천천히 걸어보며 산책하기 좋습니다.
개울을 따라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정겹고 오가는 바람이 맑고 답니다. 초록이 내려 앉은 곳에 내 안에 평온이 깃듭니다. 주위 아늑한 풍경은 발길만 닿아도 좋은 기운을 내뿜습니다. 도시에서 느낄 수 없는 상쾌함과 시원한 청량함은 덤입니다. 한 박자 느리게 거니는 동안 보약 한 첩을 지어 먹은 듯 몸과 마음은 더욱더 개운해집니다. 녹차에 깃든 느림의 미학이 어느새 우리 곁에 배여집니다.
녹차의 초록빛 에너지로 충전하다
깊은 산중에서 산소를 한가득 채워 몸과 마음이 찌든 때를 벗기는 듯 이곳에서는 녹차의 초록빛 에너지로 충전합니다.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남도민일보 2021년 6월 18일자에 실렸습니다. http://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764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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