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속 진주

진주 우는 돌, 명석 자웅석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24. 6. 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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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아이? 우는 돌! 진주 명석면 운돌

 

 

우는 아이 젖 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 못 하는 갓난아이가 울지도 않고 가만히 있으면 배고픈 것을 엄마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는 아이도 아닌데 우는 돌이 있었습니다. 우는 아이 젖 주듯 음력으로 매월 33일이면 진주 명석면(鳴石面) 운돌(자웅석·雌雄石)에게 마을 사람들이 제사를 지냅니다.

 

 

명석면사무소를 지나고 광제산 쪽으로 쭉 들어가면 지금은 남양 홍씨 재실로 사용하는 광제서원이 나옵니다. 서원 곁을 지나면 좀 더 안쪽으로 가면 드디어 운돌 앞에 이릅니다. 찾은 날은 명석각 제향이 있는 411(음력 33)입니다.

 

오전 11시에 거행되는 제향을 앞두고 천막이 뜨락에 여럿 펼쳐져 있습니다. 제례 음식을 제단에 차리는 준비가 한창입니다.

 

 

명석(鳴石)면의 유래이기도 한 운돌 곁에 있는 벚나무들은 이미 찬란한 벚꽃을 피운 뒤 초록 잎을 내세우는 중이었습니다.

 

제각 안에 모셔져 있는 운돌을 바라봅니다.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12호인 운돌 한 쌍은 남자 성기와 여자 족두리를 닮은 자웅석(雌雄石)입니다.

 

 

돌은 남자 성기를 닮은 돌로써 높이가 97cm, 둘레 214cm입니다. 암돌은 족두리 닮은 돌로 높이 77cm, 둘레 147cm입니다. 다산(多産)과 풍요(豊饒)를 빌던 선돌(立石)이었다고 합니다.

 

 

비바람 등으로부터 선돌을 보호하기 위해 비각을 세워 지금에 이른다고 합니다.

 

 

비각 앞 뜨락에는 머리에 검은 망건을 쓰고 하얀 도포를 입은 제관들과 단정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였습니다. 인근 초등학교 학생들을 실은 차가 옵니다. 선돌 한 쌍 앞에는 돼지머리며 수박, 딸기 등 차려졌습니다.

 

 

드디어 오전 11시가 되자 명석각보존회(회장 박성수)의 주관으로 지역민, 출향인사 등 1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사가 올려졌습니다.

 

 

제향에 앞서 사회자는 운돌의 유래를 먼저 알려줍니다. 고려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진주성을 정비하였다. 광제암의 스님이 성 보수를 마치고 돌아가다 저만치에서 서둘러 걸어가는 돌을 만났다. 사람도, 네발 달린 짐승도 아닌 돌을. 돌에게 왜 그렇게 급히 가느냐고 물었더니 진주성을 쌓는데 밑돌이 되기 위해 간다고 하자 스님은 이미 공사가 끝나 소용없다고 했다. 돌은 진주성의 밑돌이 되지 못한 게 서러운지 크게 울었다. 스님은 돌의 애국심에 감복하여 아홉 번 큰절을 올렸다. 이후에도 돌은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사흘 동안 크게 울었다.’라고 합니다.

 

 

먼저 초헌관인 최수한 명석면장이 지역민들의 안녕과 건강을 기원하며 잔을 올렸습니다. 이어 운돌 1쌍에게 축관은 “~명석면은 보국충석(保國忠石)인 암수 돌의 애국 혼을 바탕으로 태동한 역사 깊은 고을입니다.~오늘 제례를 올리는 우리들의 정성과 간절한 소망을 너그럽게 받아주시며 비록 조촐한 제수이지만 흠향하시옵소서! 단기 4357년 음력 33이라며 축문을 읽습니다.

 

초헌례가 끝나고 아헌례, 종헌례가 이어서 진행되었습니다. 초헌관이 첨작하고 축문을 불사르며 오늘의 제사는 끝이 났습니다.

 

 

이어서 참가자 모두는 뜨락에 있는 애국지사 호산 김용익 선생님의 비문을 향해 묵념했습니다. 항일 투사 김용익(金溶益, 18866~1970) 선생은 진주 3·1운동 때 종소리에 따라 주민들을 지휘하고 진주성 남문 앞에서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했습니다. 이후에도 광복단에 가입 군자금 모금 활동 중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다 체포되어 투옥되었습니다.

 

 

뜨락에 모인 사람들은 제사음식을 나눠 먹으며 다시금 명석면의 안녕과 건강을 기원했습니다.

 

찾아가는 길 :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신기리 산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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